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길을 묻다[기고/엘리 데이비드 로카]

1 week ago 6

엘리 데이비드 로카 스타트업블링크 최고경영자

엘리 데이비드 로카 스타트업블링크 최고경영자
필자는 80여 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연구하며 그 흥망성쇠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최근 한 달간 한국에 머물며 내린 결론은 분명하다. 한국 창업생태계는 잠재력은 크지만, 그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정부의 지원은 스타트업 생태계 성장을 견인한 동력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과도한 개입으로 자율적 발전이 가로막히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공공부문이 깊숙이 개입한 결과, 한국 창업가의 자생적 기반은 약화됐다.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시장이 아닌 정부가 주도한다. 그러나 창업 선도국 중 이 모델이 성공한 사례는 없다.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은 민간 혁신과 시장 경쟁을 통해 성장했다. 샌드버드나 눔처럼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국 기업들도 정부 의존도를 줄일수록 성공 확률이 높았다. 삼성, LG, 현대, SK의 역사가 보여주듯, 한국인은 글로벌 역량이 탁월하다. 문제는 이 역동성을 제도화된 지원체계가 되레 억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스타트업 분석기관 스타트업블링크에 따르면 서울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실리콘밸리 런던 상하이 파리 등 글로벌 톱10과 여전히 큰 격차를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활성화된 스타트업 수가 적기 때문이다(글로벌 29위). 글로벌 영향력(19위) 역시 낮다. 해외 주요 투자기관이나 액셀러레이터에서 활동하는 한국 스타트업이 극히 드문 탓이다(50위). 국내 시장에 머무는 기업이 대부분이어서, 고용 창출 효과가 큰 글로벌 스타트업이 부족하고 종사자 규모도 작다(19위).

막대한 인센티브와 공공 재원이 투입됐지만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한국 유니콘은 여전히 손에 꼽는다. 정부 정책은 여전히 창업가를 ‘보육 대상’으로 취급하고, 창업가는 고객보다 정부 지원금을 먼저 바라본다. 이 같은 구조는 투자자와 창업보육기관으로까지 번져, 민간 자본이 정부 자금과 경쟁하기 어려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결국 과도한 보호는 스타트업을 국내 시장에 묶어두고, 소비자 만족과 혁신 수준을 동시에 떨어뜨리고 있다.

해법은 명확하다. 현금성 지원 예산을 과감히 줄이고, 성장 연동성이 낮은 보조금·액셀러레이션 프로그램은 정비해야 한다. 남는 재원은 한국이 강점을 지닌 분야, 예컨대 딥테크·하드웨어·콘텐츠 등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지향 기업에 집중해야 한다. 진정한 성장은 창업 초기부터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할 때 가능하다. 정부 자금 없이는 생존하지 못하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은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시장 기반의 생태계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서울로의 과도한 집중도 구조적 문제다. 서울의 창업 활동은 국내 다른 도시의 평균보다 50배에 달한다. 이 격차를 10분의 1로만 줄여도 균형 있는 다핵 구조가 형성되고, 국가 전체의 회복력은 훨씬 강해질 것이다. 공공 예산은 영어 역량 강화, 규제 간소화, 세제 인센티브, 글로벌 홍보 등에 재배치해야 한다. ‘보조금’이 아니라 ‘단순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보여준 싱가포르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의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목적지를 알고도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와 같다. 운전자도, 탑승자도 그 사실을 알지만 누구도 핸들을 돌리지 않는다. 이제는 운전대를 다시 잡아야 한다. 정부·민간·대학·투자기관이 제자리를 찾아 시장 중심의 생태계로 전환할 때다. 한국이 그 전환의 용기를 낸다면 글로벌 리더십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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