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착시는 이중적 언어다. 우리 경제의 반도체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취지로 쓰이지만 반도체가 없는 나라들이 보기엔 부럽기 짝이 없는 걱정일 뿐이다. 대만의 대들보 TSMC를 보라. 누구도 대만의 반도체 편중을 지적하지 않는다. TSMC가 중국의 상시적 위협에 시달리는 대만의 구세주 같은 존재이듯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대한민국의 국보급 자산이다.
코스피지수가 역사적 4000 고지를 밟았다. 1년 전만 해도 감히 쳐다볼 수 없었던 봉우리다. 그 절반의 공은 반도체 몫이다. 지난해 인공지능(AI) 투자 붐을 타고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먼저 달리더니 올 하반기부터는 삼성전자가 메모리 슈퍼사이클에 올라탔다. 한때 적자였던 반도체 사업부가 대규모 흑자 구조로 돌아선다고 하니 투자자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허리띠를 졸라매며 내실을 키운 데 따른 정당한 보상이다.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이 출범 일성으로 ‘아베노믹스 시즌2’를 외치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대한민국의 보물상자를 열어본다. 양적 완화니, 확장 재정이니 떠들어도 똘똘한 기업 하나 키우는 것만 못하다. 일본 산업이 한국보다 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세계 1위 자동차기업 도요타도 건재하다. 하지만 수출에서 첨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이 일본의 두 배다. 반도체산업의 격차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이끄는 자동차산업도 일본을 턱밑까지 따라잡았다. 2020년 미국의 한국 자동차 수입액은 211억달러, 일본 차 수입액은 410억달러였다. 더블 스코어 수준이던 격차가 지난해 454억달러(한국) 대 512억달러(일본)로 바짝 좁혀졌다. 글로벌 과점화가 굳어진 시장에서 상위권 업체가 이렇게 역동적으로 약진하는 경우는 드물다. 얼마 전 미국 시사전문지 타임이 ‘2025 세계 최고 기업’을 선정하면서 현대차(33위)를 도요타(48위)보다 앞에 올려놓은 연유일 것이다. 미국이 안심하고 군함 건조를 맡길 곳도 한국 조선사밖에 없다. 일본은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했다. 지난 27일 경주에서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유창한 영어로 미국과의 해양 르네상스를 강조하는 모습은 우리 조선 산업의 독보적 위상과 역량을 실감하게 했다.
이제 곧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년 만에 정상회담을 한다. 양국 간 패권전쟁의 단기 향배를 가늠할 분수령이다. 겉으로는 우호·선린을 표방하지만 실제론 해양 대 대륙, 국가 대 국가의 완력과 배짱이 충돌하는 일대 격전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의 처지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맷돌 사이에 낀 나라”로 표현했다. 미국의 관세 폭주와 중국의 한화오션 제재를 떠올리면 대다수 국민이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누군가의 틈바구니에서 쉽게 갈려 나갈 나라가 아니다. 모든 불확실성에는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숨 쉬고 있다. 미·중 패권전쟁은 장기전이다. 자유무역을 등진 미국의 관세정책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긴 승부 속에서 첨단산업 전쟁의 승기를 마련하고 안보적 국익을 챙겨야 한다. 도약이냐, 수렁이냐 기로에 선 경제의 앞날도 여기에 달렸다. 첨단 전쟁에서 승리하면 미국도, 중국도 우리를 버리지 못한다. 우리가 대미 투자를 통해 확보하게 될 기술은 중국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반대로 승리하지 못하면 미·중으로부터 동시에 핍박당할 운명이다. 가진 것도 변변찮은 나라가 무슨 지렛대로 거친 맷돌에 맞설 수 있겠나.
이른바 ‘캐즘’에 시달려온 배터리 업체들 주가가 요즘 큰 폭으로 올랐다. 시장 상황을 보면 반도체처럼 급반전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견디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장은 그 점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다. 미국 자동차 빅3는 모두 한국 배터리 3사와 동맹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제너럴모터스(GM), SK온은 포드,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 각각 손을 잡았다. 모든 에너지는 일정 수준의 임계치를 지나면 대폭발한다. 전기차 시장은 미국 조선 시장처럼 어느 날 갑자기 개화하고야 말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우리 배터리 기업의 미국 시장 점유율이 70%에 이른다. 세상에 이런 보물들을 숨겨놓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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