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거짓에 대한 과소평가

1 week ago 9

[이응준의 시선] 거짓에 대한 과소평가

소설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쓴 게 아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도 말이 되게 쓴 게 소설이다. 소설은 현실의 비현실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세상에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다. 무함마드 깐수는 1946년 레바논인 어머니와 필리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랍어가 모국어인 이슬람교도였다. 1984년 난생처음 대한민국에 입국, 1994년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됐다. 한국어를 포함해 6개 외국어에 능한 그는 문명교류사의 석학이었다. 학점을 후하게 줘서 수강생이 넘쳐났고 저술과 강연, 신문 칼럼과 TV 역사프로그램 등에서 활약했으며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내용을 쓴 수필이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가 노영심이 진행하는 TV 쇼에 아랍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얘기하는 걸 실시간으로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1996년 7월 기상천외한 사건이 터졌다. 안기부가 북한 고정간첩 무함마드 깐수를 체포한 것이다. 기실 깐수는 1934년생 조선족 정수일이었고 이제껏 남한 사회가 알고 있던 그에 관한 모든 것은 그가 문명교류사의 석학이라는 것 말고는 ‘거의 다’ 거짓이었다. 깐수는 6개 외국어에 능한 언어 천재였지만, 정수일은 12개 국어 이상이 가능한 언어 몬스터였다. 깐수는 남한에서 다섯 살 차이가 나는 37세 간호사와 만나 결혼했고, 그녀는 깐수가 체포되는 그날까지 깐수가 정수일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자신과 1934년 만주국 출생 정수일과의 나이 차이가 열일곱 살이라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정수일은 ‘잠꼬대까지’ 깐수처럼 아랍어로 했으며 무슬림의 종교수칙과 생활방식을 따랐다. 정수일은 2000년 특별사면, 2004년에는 복권됐고, 2025년 2월 24일 90세로 죽기까지 학자로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만주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북한, 대한민국, 이렇게 4번 국적이 바뀌었다. 가짜인 레바논, 필리핀 국적까지 포함하면 6번 국적이 바뀐 셈이다. 정수일은 더 일찍 적발될 순간이 ‘살짝살짝’ 몇 번 있었는데, 1984년 5월 방을 구하러 온 그가 한국 화폐단위를 깜빡 ‘원’이 아닌 ‘환’으로 내뱉은 것과 은연중 느껴진 북한 억양을 의심한 복덕방 주인이 신고했던 게 대표적이다. 이때 대한민국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보증을 해주는 등 여러 ‘선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깐수는 풀려난다.

‘웃픈’ 것은, 그 복덕방 주인은 동네나 매체에서 깐수를 볼 적마다 미안해했다고 한다. 앞서 기상천외하다고는 했으나, 사실 전 세계 간첩사(間諜史)에 이런 예는 흔하고, 대단한 축에도 들지 않는다. 다만, 내가 무함마드 깐수 정수일 케이스를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그래서 더 보편적인 경각심을 끌어내기 위함이고, 또 이게 뭔가 ‘블랙코미디적이어서’ 대중이 읽기에 지루하지 않으리라는 계산 때문일 뿐이다. 우리에게 간첩 조작 사건이 있던 시대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도리어 ‘명백한’ 간첩들에게 특정 변호사 단체가 붙어 온갖 방법으로 수사와 재판을 방해하고, 심지어 정권이 바뀌면 그 간첩이 민주화 인사가 돼 국민 세금으로 보상금도 받고 여러 혜택까지 누리는 사례가 적잖다.

간첩은 인류사에서 유서가 깊은 직종이다. 한 개인이 한 사회를 저렇게 속이는 것은 예컨대 북한이나 중국 같은 국가 조직이 공력을 쏟아 길러내고 심어놓았기에 가능하다. 하여, 한 국가가 보낸 간첩은 상대편 국가에서 그 열 배의 공력을 들여 잡아내야 한다. 이게 상식이며, 이걸 무산시키는 것은 저절로 반역이다. 간첩 파견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동맹국끼리도 간첩 수준의 정보전을 펼친다. 외국 간첩들을 잡아내는 ‘간첩법’ 제정을 죽어라고 반대한다? 여기에 이념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안 하는 자들의 의도는 의심받아 마땅하다.

간첩에 대한 안보 시스템은, 백주대낮에 알몸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려는 자각과 그 권리다. ‘학자’ 정수일이 ‘간첩의 보편적 존재감’을 희석시켜서는 안 된다. 학문 업적이 훼손돼서는 안 되지만, 그게 간첩에 대한 과소평가로 빠져서도 곤란하다. 잘못된 미화가 가장 위험한 거짓이다. 물론 나는 진실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거짓의 힘 또한 믿는다. 거짓은 항상 진실과 비등하거나 더 강한 힘으로,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진실과 승부를 가려왔다. 우리 사회, 이 국가는, 소설보다 비현실적이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