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농경문명 장점 결합한 통치 실험… ‘오랑캐’ 거란의 균형감각[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6 days ago 4

유라시아 낳은 문명 설계자, 거란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옛 역사에 대한 이미지는 대개 그 시대를 다룬 사극이나 영화에 기반해 형성된다. 그중 북방 민족이라면 흔히 ‘오랑캐’ 이미지를 떠올린다. 매서운 삭풍(朔風)을 헤치고 털모자를 쓴 채 말을 타고 나타나는 사신, 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뜨린 변발, 거칠고 야만적인 행동…. 하지만 거란은 이러한 이미지와는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거란은 중원과 유라시아를 정복하며 고도의 문명세계를 이룩했다. ‘유목제국’이란 새 역사의 장을 열고 찬란한 예술세계를 일군 거란의 저력을 알아보자.

발해 장점 계승한 첫 유목제국

요나라(907∼1125)를 세운 거란은 만주 북부 지역에서 흉노의 영향을 받은 몽골과 퉁구스 주민들로부터 출발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비에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고구려에 복속된 존재였다.

거란을 떠올리면 많은 이들이 ‘만부교 사건’을 꼽는다. 고려가 거란 사신단을 섬에 귀양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 다리 아래 매어둬 굶겨 죽인 일이다. 신흥 강국 거란에 대한 고려의 반감 이면에는 발해 멸망의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926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수도 상경 용천부를 불태웠다. 또 흩어진 발해인들을 몽골로 옮겨 영토 개척민으로 삼았다. 몽골 친톨고이 유적에서 발견된 발해식 온돌과 유물은 거란이 끌고 간 발해인의 흔적을 생생히 보여준다. 만부교 사건은 비단 외교적 충돌이 아닌 발해 멸망에 대한 고려인들의 분노가 표출된 사건이었다.

역설적으로 거란은 발해의 선진 문물을 누구보다 냉철히 활용했다. 발해는 극동의 끝에서 탄생했지만 5개의 수도를 둔 ‘5경제’를 만들었다. 이는 권력 분산이 아닌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하기 위함이었다. 요나라는 이를 살려 상경(上京·현 네이멍구 바린쭤치)에서 남경(南京·베이징 인근)에 이르는 지역까지 초원과 농경지, 만주와 화북을 잇는 거대한 네트워크형 제국을 설계했다. 상경성은 거란의 전통을 반영했고, 중경성은 중국식 도시계획을 도입해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거란은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이중지배체제를 완성했다. 북면관(北面官)은 거란족과 유목민을 다스리며 군사적 기동력을 유지했고, 남면관(南面官)은 한족과 발해인 같은 정주 농경민을 통치하며 세금과 행정을 관리했다. 두 체제는 단순히 병렬이 아니라, 유목과 농경이라는 서로 적대적인 문명의 장점을 결합한 고도의 행정공학이었다. 종교, 문자, 장례에 이르기까지 요나라는 철저히 이중언어·제도로 작동했다. 그 복합성이야말로 제국의 안정과 팽창을 가능케 한 비결이었다.

요나라는 유목민족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직접 지배한 제국으로 평가받는다. 흉노처럼 장성 주변을 맴돈 유목세력과 달리, 거란은 한족 통치 지역에 대한 실질적 통치를 이뤘다. 거란은 발해로부터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스템을 계승했지만,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융합형 제국’의 모델을 완성했다. 이 획기적인 모델은 이후 여진의 금, 몽골의 원, 만주의 청으로 이어지게 됐다. 세계에 남아 있는 거란의 흔적

가운데 머리털을 다 밀고 주변 머리털로 장식하는 곤발(髡髮)을 한 요나라 악대의 모습을 담은 벽화.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가운데 머리털을 다 밀고 주변 머리털로 장식하는 곤발(髡髮)을 한 요나라 악대의 모습을 담은 벽화.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거란은 초원의 자유와 중국의 감각을 결합한 독특한 예술세계를 꽃피웠다. 요나라의 벽화에는 행렬과 연회, 수렵과 악대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 속에는 유목민의 역동성과 정주 사회의 향락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부장품으로 넣은 금·은제 그릇에는 호랑이와 매 등 북방의 생동감이 가득하다. 묘지석에는 한자와 함께 반드시 거란문자를 새겨 자주성을 지켰다. 거란의 대표적 유물인 요삼채는 녹·황·백에 철흑을 얹고 유약이 흘러내리게 해 유려한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중국에서 개발한 삼채라는 예술은 초원의 리듬을 기억하는 장인의 손과 화북 지역의 독특한 기술, 흙이 만나 독특한 질감을 만들었다. 오늘날 세계 주요 박물관의 중국실에선 요나라 도자기나 불교 유물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요나라 도종황제가 황후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비문. 고유 문자 체계인 거란어로 쓰였다.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요나라 도종황제가 황후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비문. 고유 문자 체계인 거란어로 쓰였다.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프랑스 국립 기메동양박물관에 소장된 요나라의 나한상. 중국의 역대 불교 유물 가운데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프랑스 국립 기메동양박물관에 소장된 요나라의 나한상. 중국의 역대 불교 유물 가운데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요나라가 멸망한 뒤 거란은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에 수도를 둔 카라키타이를 건국했다. 이후 몽골제국에 의해 카라키타이가 무너지자, 일부 세력은 서쪽으로 이동해 현재의 이란 일대에 ‘케르만 카타이’국을 세웠다. 고려의 북쪽에서 출발해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란의 여정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유라시아와 동유럽은 지금도 중국을 의미하는 말로 ‘차이나(China)’ 대신 ‘키타이(Khitai)’ 또는 ‘캐세이(Cathay)’를 쓴다. 바로 유라시아를 넘나든 거란의 흔적이다. 홍콩 항공사 캐세이퍼시픽항공의 어원이 ‘거란항공’인 셈이다.

고려거란전쟁, 고려 외교의 승리

서희의 담판, 강감찬의 귀주대첩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우리는 흔히 고려거란전쟁(993∼1019)의 극적인 장면만 기억한다. 전쟁 뒤 100년간 이어진 송·거란·고려의 평화와 교류, 즉 거란이 주도한 동아시아 질서의 본질도 종종 가려졌다.

1005년 전연(澶淵·현 허난성 지역)에서 합의한 외교협정을 통해 송과 요가 화의를 맺자 고려는 두 제국 사이에서 교역과 사절, 지식의 통로를 조율하는 중개국으로 떠올랐다. 북쪽에서는 요와의 충돌을 방어선으로 관리하고, 남쪽에서는 송과 문물 교류를 이어받은 삼각질서를 구축했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조율하며 질서를 유지한 고려의 모습은 오늘날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한국의 외교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는 중국의 변방이 아니었다. 송과 거란이라는 두 세력의 충돌에 개입해 삼국 구도를 만든 동아시아 다극질서의 행위자였다. 강동6주를 얻어낸 서희의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승리는 단순히 오랑캐를 물리친 사건이 아닌 전쟁을 이용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한 고려 외교의 승리였다.

지금 거란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많은 사람이 유목제국의 시작을 칭기즈칸의 몽골에서 찾는다. 하지만 앞서 거란이 이미 제국의 시스템을 발명했기에 몽골이 가능했다. 요나라는 유목과 농경, 초원과 중원의 제도를 함께 운용하며 다민족 통치의 실험을 완성했다. 이는 훗날 몽골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 인프라가 됐다.

유라시아 실크로드, 이중지배체제, 역참제도, 고유 문자, 불교와 샤머니즘의 공존은 모두 몽골제국이 그대로 계승한 거란의 유산이었다. 요나라의 오경제도는 훗날 몽골의 거점 도시 중심 행정구획으로 변형됐고, 거란이 남긴 교역로와 관방·행정기술자들은 몽골에 포섭돼 제국 경영의 핵심 인력으로 활용됐다. 전 세계를 호령한 몽골제국은 초원 위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부르며 무시하던 거란은 유라시아의 대변동을 주도한 세력이었다. 거란은 유목과 농경, 초원과 중원이란 가장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두 문명을 행정 및 문화적으로 결합해 대제국을 이뤘다. 그 시스템은 몽골제국을 거쳐 유라시아 전체로 퍼져 나가 훗날 제국 운영의 기본 설계도가 됐다. 거란은 타 민족에게 감정적인 적대나 문화적 우월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문명의 기술과 인력을 냉철하게 이해하고 흡수해 생존과 팽창의 도구로 삼았다. 초원과 만주, 중원과 한반도가 얽힌 거대한 순환 속에서 거란은 그 순환의 촉매 역할을 했다. 고려 역시 허브 역할을 했다.

북방 민족을 오랑캐라는 시선으로 감정적으로 타자화하기보다 그들이 구축한 복합 문명의 기술을 이해할 때 우리는 격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의 자리와 역할을 확보할 수 있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한국이 미중 사이 조정자로 나선 모습은 과거 거란과 고려가 보여준 문명 간 ‘인터페이스 기술’의 현대적 복원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 간 경쟁과 패권의 판도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1000년 전 고려와 거란의 역사적 균형감각을 되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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