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강제 마취된 부동산, 수술 집도의는 어디 있나

6 days ago 6

박용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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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고팔 때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건 비정상적인 일이다.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역을 이 같은 토지거래허가구역(토허구역)과 규제 지역으로 묶은 10·15 부동산 대책 이후 서울 아파트 거래량과 가격 상승폭이 전주의 절반으로 줄었다. 매수 심리도 두 달 만에 꺾였지만 단지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시장 심리는 여전히 사려는 사람이 팔려는 사람보다 많다. 집값도 아직 오름세다. 시중에 돈이 풀리고 주택 공급 걱정이 큰 상황에서 수요 억제 효과는 대출을 6억 원 이하로 묶은 6·27 대책처럼 언제든 증발할 수 있다.

시장 정상화할 집도의 안 보인다

초강력 규제로 강제 마취된 서울 부동산 시장이 수술대에 누워 있는데도 집도의는 안 보이는 형국이다. 서울 부동산 문제는 수십 년간 누적된 문제다. 정치인과 정책 당국자는 누구도 책임을 부인하기 어려운데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여야 의원들은 부동산 실정과 상대의 주택 보유를 문제 삼으며 본질과 거리가 먼 정쟁을 하고 있다.

수술을 집도할 정책 당국은 믿음을 잃고 있다. 이상경 전 국토교통부 차관은 이재명 대통령 부동산 공약의 핵심 브레인으로 꼽혔지만 갭 투자(전세 끼고 주택 매입)가 드러나 물러났다. 가계대출 관리가 급한 금융당국은 강남 아파트 2채를 가진 다주택자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의 주택 처리 문제가 더 급해 보인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풀어 놓은 막대한 돈이 부동산 시장에 쏠리고, 국토부와 서울시가 주택 공급에 실패했는데도 내 탓이라며 책임을 지려는 당국자도 안 보인다.

시장에서 10·15 대책으로 대출이 막히자 “주거 사다리(housing ladder)를 걷어찼다”는 비판이 거세지만, 주거 사다리는 작은 집을 더 크고 좋은 집으로 키워가는 과정을 말한다. 대출은 주거 사다리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영미권에선 주택대출 원리금과 세금을 포함한 주거 비용이 소득의 28%를, 모든 대출은 36%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28/36 원칙이라는 말까지 있다. 과도한 대출이 주거 사다리를 오르는 데 오히려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은행 돈을 빌려 집을 사는 일이 원래는 어려웠다. 외환위기 이후 시중은행들이 기업 대신 가계 대출에 손을 대면서 은행 돈이 흘러 들어왔다. 집값도 뛰었다. 주택담보대출(주담대)에 전세대출까지 증가하고 전세 낀 갭 투자까지 성행했다. 여기에다 정부가 전세대출 보증까지 섰다. 집값보다 전세금이 더 비싼 ‘마이너스 갭 투자’까지 생기고 약 3만4000명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발생했다. 청년과 무주택자들이 진입하는 주거 사다리는 맨바닥인 빌라와 오피스텔부터 무너져 내렸다.

빚이 아닌 진짜 주거 사다리 복원해야 부동산 시장 정상화는 집값 폭등과 은행 이익을 키운 ‘주담대-전세대출-전세보증’의 한국식 빚의 사다리 대신 무너진 진짜 주거 사다리를 복원하는 일이어야 한다. “기다렸다가 집을 사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기다려도 괜찮겠다”는 믿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2600만 명이 가입한 청약저축은 미래를 위한 투자 기회로 바꾸고 청년과 무주택자가 직장 가까운 곳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저렴하고 괜찮은 징검다리 주택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인공지능(AI) 등으로 오피스 수요가 더 감소할 것”이라며 오피스 공급을 주택으로 전환하는 대책도 제안했다. 저금리 시대 월세화에 맞춰 저소득층 주거 바우처를 늘리는 고통 완화책도 시급하다.

올해 초 오세훈 서울시장이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에 대한 토허구역을 해제하자 집값이 급등했다. 규제를 묶는 일보다 언제 어떻게 풀고 시장을 정상화할지가 더 어렵고 중요하다. 여야가 민생을 위한다면 더 늦기 전에 초당적, 범정부 부동산 정상화 기구를 마련하고 중장기 대책까지 포함한 대출, 세제, 공급의 3종 패키지를 내놔야 한다. 강제 마취된 시장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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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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