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5월 말 진주만 조선소에 항공모함 USS 요크타운이 반파된 채로 입항했다. 태평양의 제해권을 두고 일본과의 결전이 초읽기에 들어간 때였다. 당시 미국의 보유 항모는 4척이었다. 1400여 명의 조선소 직원은 밤낮없이 수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기적을 만들어 냈다. 3일 만에 상처를 회복한 항모는 6월 4일 미드웨이 전투의 승리를 이끄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제조와 전쟁은 인류 역사상 늘 한 세트였다. 신무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했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신민을 국민으로 묶고, 폭력의 독점을 통해 안전을 제공한 대가로 국가는 국민을 제조에 투입했다. 이에 성공한 나라는 제국이 됐고, 실패한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평화를 가져온 글로벌 공급망
소련의 해체(199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2001년)과 더불어 미국이 경찰국가를 자처하면서 전 세계는 실핏줄처럼 서로를 제조 공급망으로 엮었다. 그 덕에 인류는 처음으로 제조를 전쟁의 목적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군인을 위해 만든 인터넷, 위성항법장치(GPS) 등의 기술은 평화적 목적으로 인류의 삶에 기여하는 데 쓰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전쟁은 1991년 이후 장기 평화의 붕괴 가능성을 의미한다. 팰런티어 공동 창업자이자 미국 벤처캐피털의 큰손인 피터 틸과 조 론스데일이 최근 팟캐스트에서 나눈 대화는 미국의 리더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과 중국이 맞붙어 보유 해군력을 모두 소진한다고 가정해 보자. 누가 빨리 함정을 복구할 수 있느냐에 3차 세계대전의 운명이 달렸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팰런티어는 ‘전쟁 인공지능(AI)’을 설계하는 등 신(新)군산복합체의 선두 주자다.
현재 미·중의 대립 상황은 미드웨이해전의 전야와 소름 돋도록 비슷하다. ‘남는 게 인력’인 중국이 휴머노이드, 드론, AI에 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겠나. 노동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겠다는 말은 감언이설에 불과하다. 중국몽의 종착지는 미국을 압도할 전쟁 능력이다. 45년 동안 선전에 구축한 로봇 제조 공급망이 휴머노이드 로봇의 ‘마라톤 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오산이다. 전쟁 발발과 함께 모터, 액추에이터, 배터리, 라이다 등 로봇의 핵심 부품을 만드는 수백 개 제조 라인은 최신형 전쟁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전력(戰力)으로 전환될 것이다.
AI 투자만으론 전쟁 못 막아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가 제조를 미래로 택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 한국뿐이다. 만주 주둔군 장교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일본이 만주라는 신흥 제조기지를 어떻게 전쟁에 활용했는지를 가까이에서 목도했다. 경부선을 깔고, 포항에 제철소를, 울산에 조선소를 세운 덕에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제조강국이 됐다.
하지만 지금 K제조는 최고의 위기에 처했다. 미국은 한국의 제조를 향해 자국에 들어오라고 강요한다. 트럼프의 눈에 북한의 한반도 위협은 둘째 문제다. 중국과의 태평양 전쟁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여든 야든 ‘3차 대전의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한국은 또다시 종속의 운명을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100조원을 들인들 AI만으로는 전쟁 억지력을 갖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