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가 절로 갸웃해졌다. 수치와는 다른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였다. 어머니 병간호로 몇 개월간 병원과 요양시설을 오가던 시절, 나는 수많은 요양보호사를 만났다. 대부분이 60세를 훌쩍 넘겼고 70세 가까이 되신 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환자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도 그분들 얼굴에는 지친 기색보다는 활기가 넘쳤다.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일하는 이유가 정말 돈 때문일까. 경제적 현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현장에서 내가 본 건 단순히 금전적인 필요 말고도 다른 뭔가가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숨겨진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첫째, 일은 건강을 지키는 힘이었다. 경기 용인시의 한 병원에서 인사를 나눈 최 여사님은 올해 69세셨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굳어요. 여기라도 나와야 덜 아프고, 잠도 잘 와요.” 여사님은 하루 10시간씩 주야간 2교대로 일하셨다. 쉬는 날에는 집안일과 손주 돌봄을 겸하셨다. 빡빡한 스케줄에도 오히려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 그 자체가 보약이 된다는 게 여사님 말씀이었다.깊이 공감됐다. 나도 퇴직 후 몇 달간 집에만 있을 때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적이 있다. 자고 일어나도 피곤하고 종일토록 머리가 무거웠다. 결국 밤잠을 설치는 일이 잦아졌고, 의사의 권유로 작은 일을 시작한 뒤에야 컨디션이 점차 호전됐다. 매일 같은 시간에 나가는 규칙적인 생활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효과가 나타났다. 정신없이 지내니 무료함도 사라졌다.
둘째, 일은 자존감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알게 된 김 선생님은 늘 밝게 웃어 별명이 ‘미소 천사’였다. “환자분들이 고맙다고 말해 줄 때,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65세인 선생님은 일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셨다. 가족들이 반대해도 본인을 찾는 환자를 놔두고 쉴 수는 없다고 덧붙이셨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다던 선생님의 고백이 유독 인상 깊었다.
나도 회사를 떠난 후 비슷한 문제로 적잖이 힘들었다. 아무도 나를 원치 않는 상황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민 끝에 시작한 취약계층 청소년 멘토링이 전환점이 됐다. 나를 반가워하는 아이의 태도가 꺼져가던 내 삶의 불씨를 지폈다. 퇴직하고 나서도 내가 여전히 유용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됐다. 셋째, 일은 세상과 연결되는 끈이었다. 지역과 규모를 막론하고 모든 요양시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직원 휴게실에는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요양보호사들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때로는 웃으면서 일상을 채워갔다. “집에서는 말할 데가 없어요. 여긴 그래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63세 박 선생님은 동료들과의 시간이 즐겁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환한 미소에서 일이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나도 선생님처럼 퇴직 후에 사회와의 단절로 어려움을 겪었다. 혼자만의 날들이 반복됐지만, 먼저 연락할 이들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새로운 직장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비로소 생기를 되찾게 됐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사장과 나, 단 둘뿐이었으나 아침마다 출근하는 게 기다려졌다. 업무 중 간간이 나누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가 활력소가 됐다. 그 평범한 순간들이 퇴직의 외로움을 달래줬다.
퇴직 전엔 몰랐다. 젊을 때의 일과 나이 들어서의 일은 완전히 달랐다. 젊을 때는 승진과 연봉을 위해 일했다면, 나이 들어서는 건강과 관계를 위해 일했다. 성공에 목말랐던 과거와 달리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뒤늦게야 일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한 셈이었다.
왜 나는 지금까지 젊은이가 일하면 ‘꿈과 열정’이라고 하면서 나이 든 사람이 일하면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을까. 일터에서 확인한 요양보호사분들의 살아있는 기운은 내 편견을 산산조각 냈다. 그분들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만이 아니라 삶을 위한 적극적인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일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나이 들어서 하는 일은 생계 때문’이라거나 ‘나이 들면 일을 그만둬야 한다’와 같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일을 인생 후반의 중요한 영역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각자의 방식대로 일을 이어 나가는 게 건강하고 현명한 노후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내가 만난 분들이 바로 그러한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