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혼인신고 미루는 '탈(脫) 유교국가'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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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혼인신고 미루는 '탈(脫) 유교국가'의 진실

프랑스 아이의 절반 이상은 결혼증명서 없이 태어난다. 북유럽은 더하다. 스웨덴에선 혼외 출생률이 55%를 넘어섰고 아이슬란드는 70%에 육박한다. 그곳에선 결혼이란 그저 인생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권리가 혼인신고서 한 장에 좌우되지 않는다. 동거 커플도 결혼한 부부와 똑같은 세금 혜택을 받고, 양육권도 동등하게 보장받는다. 이런 자유로운 문화가 그들의 출산율을 떠받치고 있다.

한국에선 혼인 밖에서 태어난 아이를 ‘사생아’라고 불렀다. 첩의 자식, 정부의 아이.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는 단어들이다. ‘정상 가족’의 틀에 갇힌 유교국가 한국에서 혼외자는 언제나 불편한 존재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비혼 출생 비율이 40%가 넘은 지 오래됐지만, 한국에선 수십 년간 2%를 밑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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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2020년 6900명이던 비혼 출생아가 작년 1만3800명으로 증가했다. 정확히 두 배다. 비율로 따지면 2.5%에서 5.8%로 치솟았다. 더 놀라운 건 증가 속도다. 30년 이상 1%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수치가 단 10년 만에 세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정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결혼해야 아이를 낳는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고. 통계청 조사에서도 ‘결혼 없이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응답이 2020년 30.7%에서 지난해 37.2%로 늘었다. 한국인의 의식이 정말 급변했을까? 호주제 폐지, 미혼모 단독 출생신고 허용 같은 제도 개선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이런 증가세를 설명할 수 있을까?

관련 정부 정책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의 얘기는 좀 다르다. “인식 변화가 아니라 생존 전략입니다. 복잡하게 꼬인 부동산 정책과 대출 규제가 만들어낸 기형적 선택이죠.” 이른바 ‘부부 페널티’가 작동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혼인신고를 하는 순간, 청약과 대출에서 온갖 불이익이 쏟아진다. 작년 3월까지만 해도 배우자가 청약 당첨 이력이 있으면 ‘생애 최초 특별공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출 여력은 부부 소득을 합산해 계산하니 한도가 확 줄어든다.

반대로 미혼이면? 한부모 특별공급, 신생아 특례대출 등 정부가 쏟아내는 주거 지원책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는다. 한부모 가족에겐 연간 300만~1000만원의 지원금도 제공한다. 건강보험료부터 전기·수도·가스료, 교통·통신비 할인 혜택도 크다.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려는 싱글 부모에겐 요긴한 정책이다. 그러나 부동산업계에선 “청약받으려고 부부가 의도적으로 혼인신고를 미루거나 위장 이혼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얘기가 자자했다.

통계청의 ‘신혼부부 통계’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초혼 부부가 결혼 전에 첫 아이를 낳은 사례가 2020년 1322건에서 2023년 1527건으로 3년 새 15.5% 급증했다. 이들 대부분이 혼인 외 출산에 해당한다. 아이가 태어나도 혼인신고를 질질 끄는 커플도 늘었다. 결혼 후 1년 안에 신고하는 비율이 2014년 89.1%에서 지난해 81.0%로 떨어졌다. 2년 넘게 미루는 경우는 같은 기간 5.2%에서 8.7%로 증가했다.

온라인 육아 카페엔 이런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청약 당첨되고 혼인신고 하세요” “대출 다 받고 결혼하는 게 이득입니다” “한부모 특별공급 노리고 있어요. 남편과 따로 살 생각입니다”. 댓글엔 “저도 그랬어요” “현명한 선택”이라는 동조가 줄을 잇는다.

정부도 알고는 있다. 국토교통부는 작년 11월 한부모가족 특별공급 부정 청약 18건을 적발해 당첨을 취소했다. 한부모 양육비 부정수급 신고는 5년 새 아홉 배나 급증했다. 뒤늦게 기혼 불리 정책도 손보기 시작했다. 최근 정부는 미혼에 유리했던 청약 제도, 신생아 특례대출 등을 개선했다.

물론 혼인 외 출생아 증가를 모두 ‘무늬만 혼외자’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프랑스의 혼외 출산이 ‘사랑의 자유’를 택한 결과라면, 한국의 혼외 출산은 ‘내 집 마련의 자유’를 선택한 결과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법하다. 저출생 대책에 수백조원을 쏟아붓는 정부가 아이 낳으려는 부부에게 ‘혼인신고 하지 마라’는 역설적 신호를 보낸 것도 사실이다. 한국은 의도하지 않은 경로로 ‘탈(脫) 유교국가’를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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