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제도적 기억이 가른 韓·英의 부동산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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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제도적 기억이 가른 韓·英의 부동산 부채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는 미스터 미코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늘 빚에 쫓기면서도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그의 경제 철학은 이렇다. “연간 수입 20파운드에 연간 지출 19파운드19실링6펜스면 행복. 연 수입 20파운드에 연 지출이 20파운드0실링6펜스면 불행.”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순간 행복은 사라진다.

현재 디킨스 후예들은 선조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듯하다. 올해 2분기 영국 가계부채가 23년 만의 최저 수준인 가계소득 대비 117.1%를 기록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정점보다 40%포인트나 떨어졌다. 금리 급등과 고물가 속에서 영국인은 소비를 줄이고 빚을 갚는 길을 선택했다.

긴축 배경에는 과거 트라우마가 깊게 자리한다. 영국에 2008년 금융위기는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었다. 부채가 평범한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목격한 국가적 재난이었다. 이듬해 대출 연체로 5만 채 가까운 주택이 압류당했고, 2011년에는 실업률이 8%를 넘어섰다.

[토요칼럼] 제도적 기억이 가른 韓·英의 부동산 부채

한국도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국가 부도라는 참혹한 기억을 남겼고 2008년 금융위기 파고도 경험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려낸 부채 궤적은 영국과 반대였다. 한국 가계부채는 지난 2분기 1832조6000억원으로 1년 전 동기보다 52조9000억원 늘었다. 영국이 빚의 무게를 덜어내는 동안 우리는 빚의 산을 더 높이 쌓아 올렸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주택 투자 행태에서 갈렸다. 영국에선 집값 상승 기대보다 위험이 크다고 생각한다. 2~5년 단기 고정금리가 주류인 영국 주택담보대출 구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고정금리 기간이 끝나면 대출 이자가 갑자기 급등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 중앙은행은 2028년 6월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주담대 중 40% 이상은 부채 상환액이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영국 집값은 2008년 이후 런던의 경우 평균 연 4~5% 오르기도 했지만 고금리 충격으로 2024~2025년에는 0.7% 상승하는 데 그쳤다. 기대 수익이 낮고 위험은 확실한 상황에서 부동산에 베팅을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2분기 영국 주담대는 전 분기보다 141억파운드 감소했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 현대사에서 위기는 늘 자산 가격 폭등의 서막이었다. 정부는 각종 정책적 장치로 시장을 부양했다. 서울 핵심 지역 아파트는 반복적으로 초과 수익을 안겨줬다. 이 상승의 기억은 너무나 강렬해 금리 인상기에도 빚을 내 집을 사는 것을 합리적 전략으로 만들었다.

영국인이 타고난 금욕주의자여서 빚을 갚은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 본래 투기적 성향이 있어서 빚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선택의 설계’에 반응하기 쉽다. 사람은 특정 선택을 유도하는 환경에 좌우된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수를 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양국이 처한 게임의 규칙이 달랐다.

이 게임의 핵심 규칙은 기억이다. 경제 주체는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 확률을 갱신한다. 영국인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굳어진 단기 고정금리 주담대 제도에 따라 미래 부채의 위험을 점쳤다. 반면 정부가 20여 년간 100회 이상 부동산 정책을 바꾼 한국에선 ‘결국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을 수 없다’는 되돌림의 기대가 형성됐다.

무엇보다 선택을 결정하는 합리성의 성격이 다르다. 영국은 과거의 고통과 최근의 충격에서 나온 방어적 합리성이다. 그들의 예측이 틀려 주택 가격이 폭등해 자산 증식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 자체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틀려도 안전한 합리성이다.

반면 한국의 합리성은 미래의 기대에 모든 것을 거는 공격적 합리성이다. 고수익을 추구하지만 충격엔 취약하다. 한국의 합리적 선택은 ‘주택 가격은 반드시 오른다’는 단 하나의 믿음에 위태롭게 서 있다. 이 전제가 무너지는 순간 가장 합리적이었던 선택은 가장 비합리적인 재앙으로 돌변한다. 틀리면 파국을 맞는 치명적 합리성이다.

과거 기억에 기댄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역설적으로 사회 전체 위험을 극대화하고 있다. 합리성의 역설이다. 우리는 이런 집단적 믿음에 세워진 부채의 사상누각에 올라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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