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 두드리던 손끝, AI 세상을 열다[이기진의 만만한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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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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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대학교 1학년 때 타자를 배웠다. ‘타자라니’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 시절엔 대학에서 1학점짜리 타자 수업이 있었다. A4 용지를 타자기에 끼우고 ‘fff’를 친 뒤 한 칸 띄우고, 다시 ‘ggg’를 치고 한 칸 띄우고…. 이런 식으로 타자 치는 방법을 배웠다. 군대에 가서는 대학 때 배운 타자 실력으로 행정병이 됐다. 상관이 “야, 이거 빨리 쳐. 급해”라고 하면 번개처럼 타자기를 두들겼다. 대학원 시절에는 외국 저널에 보낼 논문을 타자기로 쳤다. 연구실 책상에서 마치 종군기자 같은 마음으로 타자기를 두들겼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나오자 타자기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논문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야 했다. 컴퓨터는 중요한 도구였다. 데이터를 받아 통계를 내고 여러 단계를 거쳐 원하는 최종 결과를 얻었다. 그때는 잡음을 피해 새벽에 실험했다. 새벽 실험실의 정적은 고독했지만 운치 있고 낭만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다.

지금은 컴퓨터를 통해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뚝딱 처리함으로써 멋진 데이터를 금세 만들 수 있다. 인공지능(AI) 덕분이다. 이젠 실험실에 있는 시간보다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예전엔 불가능했던 실험도 가능해졌다. 실험실에서 할 수 없는 실험을 컴퓨터상으로 완벽히 해낼 수 있다. 컴퓨터로 시작해 컴퓨터로 끝나는 실험도 있다.

2024년 두 개의 노벨상이 AI 연구 분야에 주어졌다. 노벨 물리학상은 AI 기계학습의 토대를 만든 그룹이, 노벨 화학상은 컴퓨터와 AI를 활용해 단백질 구조를 이해하고 설계하는 기술을 개발한 그룹이 수상했다. 노벨상은 인류 발전의 주요 변곡점에서 항상 미래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왔다. 지난해 노벨상은 양자 시대의 뒤를 이을 AI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주목할 점은 그들의 연구가 다양한 연구 생태계의 융합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제프리 힌턴은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이지만 그의 연구 여정은 구글과 깊이 연관돼 있다. 노벨 화학상은 더욱 흥미로운 시사점을 보여준다. 구글 자회사 딥마인드에서 진행된 연구가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딥마인드는 AI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를 개발해 이세돌 9단을 격파한 세계 최고의 AI 연구소다. 그동안 노벨상은 주로 대학이나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발견한 기초과학에 주어졌다. 하지만 지난해는 상업적 영역에서 시작된 연구를 직접 인정했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하나의 이벤트처럼 여겨졌다. 많은 이들이 그 순간이 AI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을 놓쳤다.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대통령 탄핵 국면으로 흐르며 관심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때 AI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면 어땠을까? 두 번째 탄핵 국면도 비슷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는 미래의 AI 첨단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의 마지막 갈림길에 서 있는지 모른다. ‘AI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시 타자기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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