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육향 담긴 평양냉면에 상실한 고향의 맛 떠올렸다[김도언의 너희가 노포를 아느냐]

2 days ago 2

서울 종로구 ‘유진식당’의 평양냉면. 한 그릇에 1만1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

서울 종로구 ‘유진식당’의 평양냉면. 한 그릇에 1만1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

김도언 소설가

김도언 소설가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은 20세기 초엽 지식인들 곁을 배회했던 마르크시즘처럼 냉면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령처럼 떠돌았다. 꽤 강렬했다. 이렇다 할 광고도 안 하고 영업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아닌 데다 툭하면 집안 사정이나 행사 때문에 문을 열지 않는데도 이 집 냉면과 수육에 길들여진 단골들의 충성도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퍼뜨린 입소문 때문에 어느새 서울을 대표하는 냉면 성지가 됐다.

유진식당은 서울 종로구 종로3가에서 인사동 초입으로 들어가는 낙원동 갈림길에 있다. 범박한 이름처럼 허름한 4층 건물 1층에 들어선 이 집의 외관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오로지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맛으로만 지금의 명성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올라온 이들도 유진식당을 행선지에 포함시키곤 한다. 그리고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합세했다.

유진식당은 안에 들어서면 입구에 있는 조리 공간부터 보인다. 메밀 반죽을 넣고 압축해서 뽑는 제면기 아래 큰 솥을 걸어놓고 면을 삶고, 바로 앞에는 커다란 사각 팬 위에 이 집의 대표 사이드메뉴인 녹두지짐을 부친다. 조리 과정을 손님들이 죄다 들여다볼 수 있게 해놓은 것인데, 맛과 위생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홀은 약 16.5㎡(약 다섯 평) 정도 규모에 4인 테이블 서너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벽에는 1인 식객들을 위해 바(Bar) 형식의 테이블을 설치해 놓았다. 벽에는 인상적이게도 창업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월남한 실향민이라는 그가 1960년대 후반 낙원상가 옆 골목에서 북한식 아바이순대와 설렁탕 식당을 운영하다가 1980년대 후반 지금 위치에서 유진식당이라는 이름으로 냉면을 팔았다. 그게 대를 잇고 있으니 업력이 무려 60년에 이른다.

이 집 냉면은 평양식이다. 육향이 진하고 간간한 맛이 나는 육수와 적당한 끈기를 가진 메밀면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냉면에는 삶은 계란, 돼지고기 수육, 오이와 절임무가 고명으로 오른다. 가위질을 하지 않은 꾸덕한 면에 식초를 몇 방울 떨궈 입안에 넣고 깔끔한 육수를 마시면 냉면만이 가져다주는 미각의 우주를 경험할 수 있다. 아, 그 황홀함이란.

한 그릇당 1만5000∼1만7000원을 호가하는 게 요즘 평양냉면 가격인데, 놀랍게도 이 집 냉면은 물냉면과 비빔냉면의 가격이 각각 1만1000원이다.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에서 주로 소일하는 나이 든, 그러나 지갑은 얇은 실향민들에게 이 집은 축복 같은 집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 한 끼를 부담 없이 먹었다는 기쁨을 넘어서 잃어버린 젊음과 지워진 기억, 그리고 상실한 고향의 대지와 자연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급격한 근대화와 이념적 대립, 분단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 고향 음식은 분명 위안과 치유를 담당한다.

유진식당은 어쩌면 노포의 본질을 가장 진솔하게 간직하면서 그 의무를 감당하고 있는 집으로 보인다. 유행과 트렌드에 편승할 수는 있어도 정통과 전통까지 흉내 낼 수는 없다. 특히 평양냉면은 그런 음식이다. 유진식당은 우리 시대 냉면의 소박하지만 진정한 본가일 것이다.

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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