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칼럼]김정은은 만만하지 않았다

5 days ago 6

金 무응답으로 ‘판문점 번개 2탄’ 불발
6년 전 ‘트럼프 쇼 들러리’ 배신감 작용
향후 ‘기괴한 브로맨스’는 이어질 텐데
‘파격외교’와 ‘불확실성’의 간극 좁혀야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저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고, 이를 각하에게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그 이상을 했습니다. 하지만 각하가 해준 게 무엇입니까. 어떤 조치가 완화됐다든가 군사훈련이 중단됐습니까. 각하가 우리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 저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대가도 못 받는 바보처럼 보이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2019년 8월 5일자)에서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발신 시점은 6·30 ‘판문점 번개’ 회동 한 달쯤 뒤였다. 2·28 ‘하노이 노딜’의 충격에 빠져 있던 김정은은 트럼프의 트위터 깜짝 제안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트럼프에게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현직 미국 대통령’이란 새로운 기록도 추가해 줬다. 하지만 북-미 간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김정은은 편지에서 북-미가 실무회담을 하기로 했음에도 한미 연합훈련이 그대로 실시되는 데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트럼프의 쇼에 들러리만 서고 말았다는 배신감을 토로한 이 장문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둘 사이의 ‘러브레터’는 끊겼다. 이후 스톡홀름에서 실무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진전 없이 결렬됐고, 그해 말 김정은은 자력갱생과 군사력 강화를 내건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지난주 트럼프의 거듭된 러브콜에도 김정은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북-미 정상 간 번개 만남 2탄은 무산됐다. 트럼프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지난 6년의 시간차를 너무 가볍게 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김정은으로선 당장 6년 전 한때의 반짝 기대감과 깊어진 실망, 그리고 오래 이어진 쓰라림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더욱이 지금의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매달리던 6년 전의 그가 아니다. 그간 차곡차곡 핵·미사일 무기고를 늘려온 데다 러시아 파병이란 승부수를 통해 반(反)서방 진영의 일원으로 중·러 정상과 나란히 설 만큼 위상을 끌어올린 터다.

사실 트럼프가 이번에도 번개 제안을 해올 것임은 북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미리부터 불응 방침을 세우고 대비한 듯하다. 트럼프의 순방 기간에 북-미 관계를 책임진 최선희 외무상을 러시아로 출장 보낸 것도, 전략순항미사일 시험 발사라는 저강도 도발을 한 것도 미리 준비한 대응 수순으로 보인다.

다만 세계 최강 권력자가 그렇게 매달리다시피 하는데도 김정은이라고 마냥 무시하기만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막후에선 비공식 채널을 통해 완곡한 거절의 뜻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김정은은 이번 무반응으로 대미 대화 조건, 즉 ‘비핵화 집념을 버리고,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한 상태에서 적대시 정책 철회를 논의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렇게 번개는 불발로 끝났지만 트럼프는 김정은을 만나러 “다시 오겠다”고 거듭 밝혔다. 한미 정상회담에선 사뭇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북이)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걸 위해 김정은과 또 모두와 함께 매우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고, 조금 인내심을 가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결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사실 트럼프에게도 6년 전 기억의 한편엔 불편함이 남아 있다. 하노이 결렬 직후부터 트럼프는 자신이 너무 거칠게 몰아붙인 게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존 볼턴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는 재무부의 대북 제재를 취소했다가 번복하는가 하면 연합훈련 중단을 놓고 참모들과 충돌하기도 했던 트럼프의 갈팡질팡 행적이 적나라하게 소개돼 있다.

물론 지금의 트럼프도 그때와는 다르다. 주변에 그를 막아서는 참모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 번개가 성사됐다면 6년 전처럼 소득 없는 깜짝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손쉽게 옛날의 플레이북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저 손짓하면 김정은이 냉큼 달려올 것으로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이번 ‘밀당’에선 김정은이 한 수 위였다.

번개 2탄 불발이 거듭 확인시켜 준 것은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의 유별난 집착이다. 김정은이 적당한 거리를 두려 할수록 트럼프의 열망은 더 커진다는 워싱턴포스트의 관찰은 적확해 보인다. 지금 한반도엔 트럼프의 파격이야말로 80년 냉전 구도를 깰 유일한 기회라는 기대와 함께 그 변덕에 좌우되는 불확실성의 위험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걱정이 크게 엇갈린다. 그 간극을 좁히는 일이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우리에게 맡겨진 시급한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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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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