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3조9000억원이 투입되는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이 어제부터 시작됐다. 소득 계층별로 상위 10%(512만 명)가 15만원, 일반 국민(4296만 명) 25만원, 차상위층(38만 명) 40만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271만 명)는 50만원을 받는다. 인구소멸지역에 거주하는 기초생활수급 4인 가구는 최대 22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소비쿠폰 지급 방식은 신용·체크카드, 선불카드, 지역사랑상품권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경기 침체와 고물가로 고통받는 국민과 취약계층의 생활을 돕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정부는 장기 연체자의 대규모 채무 조정 계획도 밝혔다.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7년 이상 상환하지 못한 5000만원 이하의 장기 연체 채무를 일괄 탕감해준다는 계획이다. 약 113만4000명이 16조4000억원에 이르는 빚을 탕감받을 전망이다. 그동안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사람과의 형평성 문제와 도덕적 해이 우려가 있지만, 오랜 기간 채무에 시달려온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등 취약 대출자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장기 연체 채무자 10명 중 6명은 60대 이상 고령층이거나 소득이 거의 없는 취약계층으로, 이들에게 채무 탕감은 재기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민생 지원 대책 앞에 똬리를 튼 세력이 있다. 불법 사금융과 사채업자들이다. 이들은 민생 지원금 지급이 본격화하면 채무자에게 “받은 돈으로 빚을 갚으라”고 압박할 게 뻔하다. 연간 약 80만 명이 불법 사금융을 이용하고, 이 중 10%가량이 불법 추심 피해를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금융회사의 대출 문턱을 넘지 못해 불법 사금융으로 떠밀린 20~30대 청년층이 10명 가운데 1명이라는 게 서민금융연구원 분석이다. 그 피해는 매년 불어나는 추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1~4월 금감원 불법사금융 피해신고센터에 접수된 상담·신고 건수는 5554건으로 전년 동기보다 12.8% 늘었다.
민생 지원금은 법적으로 압류가 금지된 재원이지만, 사채업자들은 온갖 수단으로 이를 가로채려고 할 것이다. ‘빚은 지옥까지 쫓아간다’는 말은 엄연한 현실이다. 정부 지원금이나 채무 탕감으로 생긴 여유 자금은 이들의 주요 표적이 된다. 정부의 단속에도 지역사랑상품권을 불법으로 현금화하는 속칭 ‘깡’(할인매매)이 전국적으로 성행하는 중이다.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상품권이 5~10% 할인된 가격에 버젓이 거래되고 있다. 지원금이 본격적으로 풀리면 “깡을 위한 큰 장이 설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신용·체크카드와 선불카드도 ‘깡의 안전지대’는 아니다.
서민에 대한 채무 탕감을 앞두고 채권 추심 시장도 대목을 기대하고 있다. 악덕 추심업자들이 채무자를 압박해 탕감으로 인한 여유분을 갈취하려는 시도가 거세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민은 지원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다시 불법 사금융의 덫에 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정부 지원이 서민의 손에 안전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실질적인 현장 단속과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 불법 사금융의 추심 행위를 근절하는 동시에 신고·상담·구제까지 원스톱으로 연결되는 피해자 보호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지역사랑상품권 등 지원금의 불법 현금화 및 암거래 단속과 처벌 역시 대폭 강화해야 한다. 단순히 돈을 지급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혜택이 서민에게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사후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 국민 혈세가 단 한 푼이라도 악덕 사금융의 배를 불리는 데 쓰여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