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신뢰 잃은 베네수엘라 나락으로
요즘 베네수엘라 얘기가 한국 정치권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한국이 베네수엘라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으로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과도한 복지정책, 정치적으로는 사법부를 장악하기 위해 대법관 증원을 추진하고 있다는 등의 지적이다. 이런 주장은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 없이 베네수엘라로부터 배울 수 있는 한 가지를 꼽는다면 ‘정부 정책이 신뢰를 잃으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 정권(1999∼2013년) 시절 원유 수출 통제권과 복지 프로그램 운영 권한을 가진 고위 관료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국민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목적이 공익이 아닌 고위 관료들의 사익 추구에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책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2003년 외환을 통제하기 위해 공식 환율을 달러당 고정환율로 설정했다. 하지만 정부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국민들은 암시장에서 더 높은 가격으로 달러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이 경쟁적으로 달러를 사들이면서 베네수엘라 화폐 가치는 폭락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화폐 발행을 남발했다. 뉴욕타임스(NYT) 등은 올해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을 최대 600%로 예상하고 있다.
韓 부동산 정책 신뢰 상실 위험 징조
한국에서도 위험 징조가 보인다. 부동산 정책을 총괄하는 이상경 전 국토교통부 1차관은 33억 원이 넘는 아파트를 전세 끼고 매입(갭투자)해 놓고 다른 국민들은 못 하도록 막는 정책을 내놨다. 그리고 국민들에게는 “돈을 더 모은 뒤 집값이 떨어지면 사라”고 말해 분노를 자아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도 만만찮다. 그는 다주택·비(非)실거주 논란에 휩싸이자 서울 서초구 아파트 두 채 중 한 채를 매물로 내놨다. 그런데 매도 가격을 한 달 전 실거래가보다 4억 원 높게 책정했다.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 정책과는 반대로 행동한 셈이다. 대통령실 주요 참모 중에서도 최근 26억 원짜리 서울 강남 아파트를 갭투자로 매입했거나, 40억 원 상당의 강남 다세대주택을 6채 보유한 이도 있다.정부 고위 관료들의 행동이 정책의 목표와 상충될 때, 국민은 정책의 의도와 정당성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신뢰가 상실되면 정책에 대한 순응 의지가 사라진다.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는 국민들이 많아지면서 결국 정책은 실패하고 심각하면 민주주의의 위기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반면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정부가 어려운 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자본이 된다. 정책 신뢰는 민주 정권의 필수적인 통치 자원인 셈이다.
지금 정부와 여당은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정책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해야 한다. 마침 김윤덕 국토부 장관은 고위공직자들의 부동산 백지신탁, 다주택자 승진 제한 등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또 전현희 최고위원은 육군사관학교와 태릉골프장 이전을 포함해 서울 아파트 공급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정책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들은 평가할 만하다. 다만 이번에도 말의 성찬에만 그친다면 집값 급등이 아니라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처럼 말이다.
김기용 산업2부장 kky@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

1 week ago
6
![[만물상] AI 커닝](https://www.chosun.com/resizer/v2/K5H3H72UKRAAXMHCJTIIR5RBK4.png?auth=bea912f507e4aedfba737b8739f738af3cbe8142c2e49a71590482075488524e&smart=true&width=591&height=354)
![[기고] AI 제조 혁신의 성패, 내재화·생태계 구축이 가른다](https://static.hankyung.com/img/logo/logo-news-sns.png?v=20201130)







![닷컴 버블의 교훈[김학균의 투자레슨]](https://www.edaily.co.kr/profile_edaily_512.png)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