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 대지주 양반가에서 태어난 전형필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작은아버지 양자로 들어가면서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막대한 유산까지 상속받았습니다. 이는 훗날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에서 법학을 공부한 전형필은 스승 위창 오세창을 만납니다. 전형필은 위창에게 문화의 힘이 곧 민족의 근간이라는 것을 배우고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서화와 도자기, 불상, 서적 등 많은 조선의 문화유산을 무차별적으로 반출하고 있었습니다. 전형필은 전국을 돌며 헐값에 팔려 나가던 유물을 사들였습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신윤복의 그림, 김정희의 글씨 등 오늘날 국보로 지정된 유물 여럿이 그의 손을 거쳐 보존되었습니다.특히 국보 제70호 ‘훈민정음해례본’을 지켜낸 일은 유명합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이 극심하던 1943년, 소유자가 당시 돈으로 1000원을 부르자 그는 “귀한 것은 제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서울 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1만 원을 내밀었습니다. 6·25전쟁 때도 해례본을 품에 안고 피란을 가서 끝내 지켜냈습니다. 덕분에 오늘날까지 한글 창제의 원리를 온전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1938년 전형필은 한국 최초 근대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라 민족문화 가치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려는 신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반인에게도 전시를 개방해 문화의 공공성을 실현했습니다. ‘문화유산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닌 민족 모두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평생 모은 문화재를 이곳에 기증했습니다.
간송미술관에서는 이달 말까지 근대 수장가 7인의 컬렉션을 공개하는 가을 기획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민족의 혼을 지켜낸 문화의 현장이자,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가치를 앞세운 전형필의 정신을 간송미술관을 찾아 느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이의진 도선고 교사 roserain9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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