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트럼프 일방주의 시대, 한국의 역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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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트럼프 일방주의 시대, 한국의 역할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부터 세계를 상대로 벌인 무역전쟁에서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거의 모든 교역상대국이 트럼프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협상에 합의했다. 트럼프의 부당한 보호무역정책에 단호하게 보복 조치하겠다고 공언하던 EU도 미국의 수출품에는 무관세를 적용하는 반면 EU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제품에는 15%의 관세를 부과하는 불평등한 협상에 동의했다. 한국, 일본 등 대다수 국가도 이런 불평등을 수용했다. 또 지난 한·미 정상회담을 큰 외교적 파란 없이 무사히 넘긴 줄 알았는데, 미국 내 한국 기업들의 공장 건설 현장에서 최근 300명 이상의 한국 근로자가 체포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견인해오던 다자간 자유무역 체제가 삽시간에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무법천지로 바뀌었는가? 방위비 협상을 포함해 한·미 간 모든 현안에서도 이런 불평등 협상이 계속되며 우리는 미국의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지 혹은 다른 대안이 있는지 냉철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거의 전 세계가 트럼프의 일방적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는 기이한 현상의 배경은 무엇인가? 1930년대 대공황 시기와 1·2차 세계대전 직전의 무역전쟁에서는 미국이 관세를 일방적으로 인상하면 유럽 주요국도 즉각 맞대응해 세계적 무역전쟁으로 비화했다. 그러나 이번 무역전쟁은 달랐다. 트럼프의 위협 앞에서 국가 대부분이 보복 대신 양보로 대응했고, 사실상 ‘백기’를 든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그 배경에는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안보적 요인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안보 질서를 미국이 주도한 결과, 유럽은 독자적인 군사력보다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체제에 의존하게 됐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EU가 독자적으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군사·외교적으로 개입하길 기대하는 상황에서, EU는 무역 분야에서 일방적 양보를 선택했다. 일본과 한국도 안보에서 미국 의존도가 높다.

핵무장이 안보력의 결정적 변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핵비확산체제(NPT)는 미국의 우위 구조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무역협상과 핵 문제가 직접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안보 불균형이 협상 전반에 구조적 제약으로 작용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앞으로도 양자 간 협상이 중심이 되는 한 한국, 일본, EU가 미국을 상대할 때 힘의 논리 때문에 불리한 결과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국제무역 질서를 회복하는 유일한 대안은 다자주의 체제를 복원하려는 노력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 해결 기능이 사실상 정지된 현 상황에서, 기존 다자주의 무역체제를 되살리는 동시에 기후변화와 디지털 무역규범 설정 등 다자간 협력체제 구축에서 한국이 가진 ‘중추적 중간국가’의 역할을 보여줘야 한다. 즉 한국이 이런 다자협력 네트워크에서 소극적 추종자가 아니라 적극적 국제규범 설계자로서 다른 나라와 정책 공조를 해 새로운 무역 규범을 선도할 경우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더 이상 일방적 수용자가 아니라 조율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결국 교훈은 분명하다. 힘의 불균형을 받아들이는 태도로는 불리한 협상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안보 의존의 제약 속에서도, 세계 다수 국가가 지지하는 기후변화와 디지털 무역, 인공지능(AI) 관련 규범을 포함한 다자주의 국제무역질서 복원을 주도하는 노력은 우리 미래세대의 생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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