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이른바 ‘에루샤’의 한국 법인 총매출은 무려 4조5573억원이다. 명품 소비가 단순한 유행이나 기호를 넘어 이제는 어떤 사회적 상징이 되고 있다. 특히 이 매출은 전년 대비 약 9.8% 증가한 수치로, 경기 침체와 고금리 속에서도 소비자들은 ‘작은 사치’가 아니라 ‘큰 위안’을 명품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같은 기간 한국의 여행수지는 125억달러(약 18조원) 적자를 기록했다. 사상 다섯 번째로 큰 여행수지 적자다. 엔데믹 이후 해외여행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외화 유입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해외로 돈이 빠져나가고 국내에서는 명품 소비로 돈이 몰리는 기형적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게다가 정치권은 주 4.5일제, 주 4일제까지 꺼내 들어 정책 포퓰리즘이 한껏 고개를 들고 있다. 국민의힘은 ‘금요일 오후는 쉼’이라는 주 4.5일제를, 더불어민주당은 주 4일제 시범 도입을 제안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자는 주장에는 일정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와 조건을 따질 때다. 생산성 혁신과 산업 구조 개편 없이 정치적 인기몰이만을 위한 정책은 결국 다음 세대의 몫을 갉아먹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으로 귀결될 수 있다.
정치는 책임이다. 정치인이 재정 책임성을 무시하고 단기적 혜택을 쏟아내면 결국 그것은 미래세대가 감당할 국가부채로 남는다. 1인당 국가채무가 이미 2000만원을 넘어섰다. 잠재 부채를 포함하면 10배인 2억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이 시점에서 또 다른 지원금과 공짜 정책은 “국민의 삶을 돕는다”는 미명 아래 실은 미래를 훼손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 모든 현상 뒤에 정치 리더십 부재가 있다. 정책은 방향이 아니라 인기와 구호로 포장되고 책임보다는 다음 선거만 바라보는 정치가 판을 친다. 소비와 여가 중심의 사회 흐름 속에서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는 문화는 ‘덜 일하고, 더 놀고, 공짜로 받자’는 잘못된 기대를 낳는다. 결국 사회의 긴장감을 무너뜨리고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유행이 된 징검다리 근무일을 임시공휴일로 하자는 ‘묵계’가 모두가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이며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정치 리더십 위기는 국가 산업 경쟁력 위기로 직결된다. 지금 우리 기업들은 고금리, 고환율,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을 이어가고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주력 산업은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에 휘말렸고, 내수 기반 기업은 고정비와 인건비 상승에 신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시간 단축’이나 ‘현금성 포퓰리즘’은 기업에 이중 부담이 된다. 결국 투자가 줄고 일자리는 불안정해지며 청년 세대의 미래는 더욱 멀어진다.
따라서 진정한 리더는 단기적 인기 영합 정책보다 구조개혁을 꺼내야 한다.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워도 꼭 필요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산업구조를 혁신하고 교육과 노동시장을 연결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근본적 개혁 없이 소비 진작만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는 없다. 청년세대에 덤터기 씌우는 연금 개악을 멋진 개혁으로 포장하는 정치 기술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국민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기 있는 말만 하는 리더, 반짝이는 공수표로 무장한 단기적 인물들에게 열광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절실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정공법으로 난제를 풀 수 있는 리더십이다. 미래를 위한 통찰과 용기 있는 선택이 없다면, 대한민국은 ‘에루샤 소비 강국’으로는 남을지 몰라도 지속 가능한 나라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