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했다. 소진된 하루의 끝에는 소중히 남을 의미랄 게 없었다.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에 휩쓸려 끌려다닌 기분이랄까. 더구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매일의 경험과 사유가 납작해지는 걸 느꼈다. 몸에 밴 종종걸음을, 내 삶의 속도를 늦춰야만 했다. 평범한 하루라도 여행자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낯설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 보기, 소소한 것들을 발견하고 감탄하기, 만끽하기, 감사하기, 의미를 찾는 순례자처럼.
작업실로 향하는 오후, 한영애의 ‘가을 시선’을 들으며 은행나무 길을 걸었다. 글쓰기 전 마음가짐을 예열하는 산책처럼 풍경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휘돌며 떨어졌다. 오래된 가게와 철물점, 기사식당이 자리 잡은 길가로 택시들이 줄지어 쉬어가고, 보도블록에 의자를 내어두고 한담을 나누는 사람들, 발치에 은행잎을 툭툭 차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은행잎 사이로 어른거리는 가을볕도 따스한 노랑. 노란 볕을 쬐며 걷던 마음, 혼자여도 쓸쓸하지 않고 어우러져 풍경이 되었던 시간, 그때의 공기와 소리, 온도와 색채 같은 모든 걸 기록하고 싶었다. 귓가에 노래가 흘렀다. ‘모든 것 이해하며 감싸안아 주는 투명한 가을날 오후.’
단골 카페에 들렀다. “10분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로스팅 기계를 돌리던 카페 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짙은 원두 향을 맡으며 카페를 둘러보았다. 문득 이 공간을 꾸려온 주인의 태도가 새삼스러웠다. 매일 원두를 로스팅하는 부지런함, 가격을 올리지 않는 고집스러움, 10개 모음 드립백에 11개를 채워두는 마음 씀씀이 같은 것. 따져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충실한 마음이 느껴졌다. 얼마 후 주인이 로스팅룸에서 나오며 말했다. “따뜻한 라테 주문하실 거죠?” 단골을 알아보는 묵묵한 마음도, 마음가짐이 드러나는 자세를 ‘태도’라고 하던데. 내가 가다듬고 싶은 마음과 글 쓰는 태도도 그와 같다고 깨달았다. 카페에서 쓴 메모를 초고 삼아 이 글을 쓴다.“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 언젠가 옮겨 적어둔 문장을 곱씹는다. 나는 내 인생의 순례자였나 관광객이었나. 유명하고 대단한 것들을 더 빨리 더 많이 보려고 재촉하진 않았나. 효율적이고 좋은 것들만 대접받으려고 요구하진 않았나. 완벽하길 바라던 계획과 기대들이 어그러진다고 불평하고만 있진 않았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더라도 내 인생의 의미는 스스로 찾고 싶다. 나에게 소중한 풍경과 사람과 영감을 발견하고 감탄하고 감사해하면서 삶 곳곳을 순례하고 싶다. 흘러가는 인생을 주도적으로 충실하게 살아보겠노라는 다짐, 나는 내 인생의 순례자가 되고 싶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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