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나는 시[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7〉

4 days ago 4

한밤중 당근을 먹다가
문득 멈춘다
당근을 씹는 경쾌한 소리

말들은 당근을 먹을 때
얼마나 요란한 소리를 낼까

여름밤 선풍기 소리
겨울 유리창이 어는 소리
잠의 문이 열리는 소리
밤이 흰 상복을 입는 소리

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스물이었을 때
서른일곱이었을 때
다시 아홉 살 마음으로 돌아가던 소리

시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당근을 씹는
고요한 밤

가만히 들어보다가
멈추었다가 다시―강성은(1973∼ )

화자는 한밤중에 당근을 씹다 “경쾌한 소리”에 놀란다. 그러다 말들이 당근을 먹는다면 얼마나 요란한 소리를 낼까 상상한다. 상상은 멀리 뻗어나가 3연에서 놀랍게 확장된다. 여름밤에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겨울에 유리창이 쩍쩍 갈라져 얼어붙는 소리는 누구나 아는 소리다. “잠의 문이 열리는 소리/밤이 흰 상복을 입는 소리”는 어떤가, 누군가 열일곱 살, 스무 살, 서른일곱 살일 때 “다시 아홉 살 마음으로 돌아가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이런 소리는 귀가 열 개라도 들을 수 없기도 하고, 귀가 한 개도 없이도 시적 감각으로 들을 수 있기도 하다. 시가 소리로 오는 순간을 알아채기만 한다면!

소리 나는 시는 들리기만 하는 시가 아니다. 소리 나는 시는 보이고, 만져지고, 향기가 날 수도 있다. 어떤 소리는 가냘파 부서지고 어떤 소리는 차가워 얼어붙을 수 있다. 미세한 소리를 알아채는 사람, 들을 수 없는 소리까지 듣는 시인은 고요의 극한을 경험한 사람이리라.

잠의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들으려면 주위가 얼마나 고요해야 가능할 것인가! 시인의 더듬이가 투명하게 길어져, 잠의 자기장 주위를 유영할 것만 같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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