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내려앉은 어스름하고 몽환적인 저녁에 시작된 행사의 첫 번째 주인공은 집이었다. 얇고 휘어진 나무까지 그대로 사용해 얼기설기 엮은 천장과 두꺼운 장지로 막은 나무창. 2층 격자무늬 창문으로는 잎 넓은 가로수가 화사한 풍경으로 펼쳐졌다. 원래 철거 수순을 밟던 할머니의 집이었는데 그곳에 쌓인 오랜 시간이 훅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 한 치과의사 손자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 집이 더 아름답게 보였던 이유는 2층 마루와 창턱 곳곳에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물들이 정성스레 놓인 덕분이다. 오래된 물건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세월의 풍화로 무뎌지고 둥글어지고 푸근해진 존재들. 표면의 생기 대신 온몸에 희미하고 나직한 빛이 들어가 있는 듯해 그저 가만 바라보고 만져 보고 싶어진다. 현장에는 다완부터 주병, 접시와 항아리까지 다양한 기물들이 있었는데 컬렉션 소장자는 한약사 ‘고요’다. 고려청자에 빠져 무려 100억 원을 쏟아붓는 지인을 보며 호기심으로 청자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새로운 열정의 불쏘시개가 됐다.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해 고문헌에 나오는 사료를 더해가며 나눈 이야기들도 재미있었다. “손에 착 감기는 소다완은 지름 13cm, 정호다완은 15cm로 최적의 크기가 다 정해져 있다”는 설명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다도를 이야기할 때 막사발이 빠지지 않는다. ‘막’이라는 접두어 때문에 즉흥성이 부각되지만 이렇게 ‘막’ 만들기 위해서는 그 밑단에 고도의 숙련도와 형태에 대한 감이 지문처럼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이 기물들에 들깨와 들기름으로 맛을 낸 버섯무침과 한약 삼계탕, 깻잎 버무림을 올려 낸 신승연 씨. ‘도시여자’였던 그는 어느 날 자주 가던 동네 방앗간이 재개발로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덜컥 그곳을 매입해 ‘경성참기름집’ 주인이 된다. “이유를 대라면 뭐라 할 말이 없어요. 처음에는 사건, 사고도 많았어요. 압력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기계가 터진 적도 있어요(웃음). 기계 안으로 흘러내린 기름이 구멍을 막아 또 고장이 나고요. 기계 공부와 더불어 기름 공부도 병행했는데 우리 들기름과 참기름이 해외 유명 올리브오일에 밀릴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이 우수성과 매력, 그리고 가치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아름답게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 미식회까지 기획하게 됐습니다.” 맛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며 어떤 공간에 뭉근하고 뜨거운 숨을 확 불어넣는 주체는 바야흐로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갖게 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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