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난달 30일, 이러한 인식을 뒤엎는 기상천외한 상황이 연출됐다. 서울 강남구의 한 치킨집 창가 자리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모여 앉았다. 폐쇄적인 고급 한정식집도, 호텔 라운지도 아닌 그들이 택한 장소는 이름부터 소박한 ‘깐부치킨’. 수백조 원대 자산가 셋이 두 손으로 치킨을 뼈까지 발라 먹은 뒤 손가락을 쪽쪽 빨았고, 동네 아저씨들처럼 소맥을 말아 러브샷을 하기도 했다. 흥에 겨운 황 CEO는 치킨을 직접 접시째 들고 밖으로 나와 구경하던 시민들과 취재진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세 리더가 맥주잔을 들고 웃는 사진은 합성으로 의심될 만큼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낯섦에 호응했다. 형식적이거나 권위적인 이미지로 박제됐던 대기업 총수에 대한 인식이 한순간에 뒤집힌 것이다.
커뮤니케이션학의 ‘기대 위반 이론’에 따르면, 예상 밖의 행동은 강한 주목을 끈다. 당연히 ‘치킨 먹는 총수’는 파격적이고 신선했다. 그런데 기대 위반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려면, 그 인물에 대한 기본적인 호감이 사전에 형성돼 있어야 한다. 사실 이 회장과 정 회장의 이미지 개선 시도는 계속돼 왔다. 이 회장은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리더로, 정 회장은 지시하기 보다 듣는 리더로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형식보다 실무를 중시하며,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거나 현장을 직접 챙기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꾸준히 노출됐다.
그런 그들이 황 CEO를 만나자 긍정적인 시너지가 폭발했다. 황 CEO는 늘 검은 가죽 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무대에 서는, Z세대가 열광하는 실리콘밸리의 전설이다. 그의 자수성가형 천재 CEO 이미지는 이미 대중에게 ‘호감형 리더’의 상징이었다. 그 긍정적인 인상이 옆자리에 앉은 한국의 대기업 총수들에게 자연스럽게 번졌다. 그 순간 딱딱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총수 이미지는 ‘치킨집의 친근한 테크 리더’로 바뀌었다.물론 이날의 회동이 철저히 기획된 ‘설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진위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사람들은 연출 여부에 주목하기보다 그날의 가볍고 유머러스한 장면에 환호했다. 실제로 치맥 회동 뒤 이어진 엔비디아 행사에서 이 회장이 술을 먹고 불콰해진 얼굴로 “그런데 왜 이렇게 아이폰이 많아요” 같은 농담을 던지고, 정 회장이 “사실 이 셋 중 내가 제일 막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웃음으로 이어진 것도 대중과의 심리적 거리감이 좁혀진 덕분이었다.
반면 우리 정치인은 여전히 국민 ‘비호감’ 직군이다. 국민 손으로 뽑은 국민의 대표라고 하지만,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꼽힌다. 소셜미디어로 소통하면 ‘홍보용’이라는 말이 돌아오고, 봉사활동을 해도 ‘쇼’라며 조롱이 따른다. 잘하면 그저 당연한 일이고, 못하면 역시나 욕을 먹는다.
왜 이런 감정이 생길까. 정치인은 원래 ‘공복(公僕)’으로서 국민 아래의 존재다. 선거 때면 이를 내세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그 ‘아래에 있었던 사람’이 법을 만들고 정책을 결정하며 주인 노릇을 한다. 이 지위의 역전에서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낀다. 자신을 섬기겠다던 존재가 어느새 자신 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 위화감이 곧 불신이 되고, 결국 정치인에게는 위선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애초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약하기에 그들의 어떤 파격도 쉽게 ‘쇼’로 오해받는다. 결국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발성의 ‘서민 코스프레’가 아니다. 신뢰는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라 꾸준한 태도와 일관된 방향에서 만들어진다. 대기업 총수들이 실무 중심 행보를 오래 이어온 끝에 새 이미지를 만든 것처럼, 정치인에게도 꾸준한 노력을 통해 긍정적 이미지를 쌓는 일이 필요하다. 9회 지방선거를 200여 일 앞둔 지금, 정치권이 참고해야 할 것은 ‘깐부 회동’의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을 가능케 한 시간의 축적이다. 중요한 건 무엇을 보여줄지가 아니라, 지금부터 무엇을 쌓을지다.송은석 사진부 기자 silver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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