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국 기업사를 새로 썼다. 지난주 ‘꿈의 10조원 클럽’에 동시 가입했다. 매출이 아니라 영업이익, 한 해가 아니라 한 분기 실적 기준이다. 내년엔 ‘분기 영업이익 20조원 시대’를 열 것이란 진단이 솔솔 나온다. 9월 이후 코스피 시가총액 증가분의 60% 이상을 두 회사가 합작했다. 주력산업 노쇠, 자유무역 종언으로 탈진지경인 산업 전반에 한 줄기 희망을 쐈다.
지금 두 회사가 없다고 상상해보면 얼마나 막막한가. 이런 아찔한 상상은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SK그룹 지주사 SK㈜는 2003년 15% 지분을 확보한 헤지펀드 소버린과 건곤일척의 분쟁을 벌였다. 소버린은 2대 주주 자격으로 최태원 회장의 퇴진을 강력 요구했다.
그때 소버린이 이겼다면 또 하나의 ‘K반도체 전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 회장은 힘겹게 승리한 뒤 회사 안팎의 거센 반대를 뒤로한 채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를 결행했다. 예민한 후각으로 ‘HBM 대박’까지 일궜다. 장기 적자 탓에 모든 인수 후보가 포기한 워크아웃 기업을 초일류로 변모시켰다.
삼성전자 모회사 삼성물산도 2004년 헤르메스를 시작으로 20여 년간 해외 투기 세력에 시달리는 중이다. 특히 엘리엇은 10년에 가까운 파상공세로 기어이 이재용 회장을 법정에 세우는 집요함을 보였다. 지난한 법정 다툼 끝에 이 회장은 최종 무죄 판결로 지배력을 지켜냈다. 만약 졌다면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개, 깐부 결의, 인공지능(AI) 강국 서사는 힘들었을 것이다.
투기 펀드와의 싸움을 버티며 경제 하방을 떠받치는 두 회사 앞에 더 강력한 적이 등장했다. 정체는 우리 내부의 주주 포퓰리즘이다. 두 차례의 상법 역주행이 심각성을 보여준다. 이사에게 부과한 ‘주주 충실 의무’는 혁신을 원천 봉쇄할 비수다. 이런 상법하에서는 하이닉스 인수같은 ‘리스크 테이킹’은 불가능에 가깝다. 소액주주를 최우선하지 않은 불충죄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상법 개정도 소액주주라는 이름 뒤에 똬리를 튼 투기 집단에 날개를 달아준 방향 착오다. 대주주 의결권 3% 제한, 집중투표제 의무화로 100대 기업 중 16곳이 외국 자본에 넘어갈 위험(한국경제인협회)에 노출됐다.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세 번째 상법개정의 연내 완수도 예고됐다. 소각 의무화가 글로벌스탠더드라는 것부터 가짜 뉴스다. 영국 일본 등 대부분 국가가 소각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주마다 다르지만 미국도 마찬가지다. 시총 30대 기업 평균 자사주 지분율이 24%로 한국 30대 기업(2.3%)의 10배다. 소각이 밸류업을 부를 것이란 주장도 단견이다. 매출·이익에 영향을 못 미치는 소각이 기업가치를 올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삼성과 SK가 국적성을 유지해낸 비결이 자사주다. 삼성물산은 5.8%, SK는 4.5% 자사주를 백기사에게 넘겨 경영권을 지켜냈다. ‘글로벌 시대에 주인이 해외 펀드면 어떠냐’고 혹자는 반론한다. 누구든 경영을 잘해 회사, 투자자, 국가에 이익을 안겨주면 그만 아니냐는 주장이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는 이 논리야말로 SK를 공격한 소버린의 핵심 주장이었다. 하지만 자본에도 국적이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경제가 안보이자 미래인 시대의 산업 자본은 더욱 그렇다. SK와 삼성이 소버린, 엘리엇을 거쳐 중국 자본 통제하에 편입됐다고 상정해보면 답이 분명해진다. 투기 자본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장담컨대 투기 세력의 냉혹함은 가장 악한 국적 대주주와 비교해도 족탈불급일 것이다.
여당의 상법 개정은 ‘지배주주 해체’라는 방향성을 갖는다. 대주주가 사라지면 주주 간 집단지성이 작동할 것이란 기대는 착각이다. 외국인을 빨아들이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10대 상장사가 전부 오너 체제다. 전횡은 일벌백계하되 검증 안 된 흑백 논리로 검증된 성공 문법을 단죄 대상 삼아선 안 된다. 외국인은 대주주 중심 K제조의 일사분란함을 재평가하고 베팅 중인지 모른다. 젠슨 황이 이끄는 엔비디아, 일론 머스크가 군림하는 테슬라처럼.
자사주 의무 소각 마무리로 행동주의 특혜 입법이 완성된 뒤 후과가 두렵다. 단기 차익실현을 최우선하는 펀드의 해악은 MBK·홈플러스 사태가 잘 보여준다. 정치든 정략이든, 투자든 투기든 최소한의 자제까지 잃어선 안 된다.

5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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