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北 김영남 처절한 생존술

5 days ago 7

6·25 무렵 북한의 20대 김영남은 북한군 입대가 아니라 모스크바 유학을 갔다. 북의 미래 인재로 뽑힌 것이다. 몇 년 뒤 귀국했는데 김일성 세력과 연안파(친중), 소련파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다. 1956년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몰락했다. 갓 귀국한 덕에 김영남은 소련파로 몰리지 않았고 목숨을 부지했다. 김일성식 정치를 일찌감치 체험했다.

▶40대 중반에 노동당 외교를 총괄하는 국제부장이 됐다. 김일성 딸 김경희가 국제부 1과장, 그 남편 장성택이 6과장이었다. 김일성 일가와 인연이 생긴 것이다. 1983년엔 외교부장에 올랐다. 그런데 그해 10월 북이 아웅산 테러를 저질렀다. 1987년엔 KAL기 폭파 테러도 일으켰다. 세습 권력을 굳히려는 김정일의 도발이었다. 북 소행이란 증거가 세계에 다 드러났는데도 김영남은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남조선 자작극”이라고 선전하고 다녔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