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이달 초 새 주택 법안이 상원을 넘었다. 상임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정쟁이 심한 워싱턴DC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법안 명칭은 ‘아메리칸 드림 기회 갱신을 위한 주택법’. 법안의 주요 목표는 주택 공급 확대다. 이를 위해 주택 인허가와 환경평가 절차 단축, 규제 완화, 공급 확대 지역을 위한 기금 신설, 노후 주택 수리에 보조금과 대출 탕감 등 다양한 방안이 망라됐다. 법안이 나온 배경엔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집값과 임대료 급등이 있다. 한국처럼 미국도 요즘 집 때문에 난리다. 집값은 중위가격 기준으로 10년 새 80% 넘게 뛰었다. 대도시 집값은 더 올랐다. 임대료 부담도 커졌다. 주택 공급은 수요에 못 미친다. 코로나19 이후 막대한 돈 풀기와 공급망 쇼크에 따른 자재값 상승, 인건비 인상 등이 겹친 탓이다.
한국과 닮은 점이 많지만 해법엔 차이가 있다. 미국은 철저히 공급 확대에 초점을 맞춘다. 의회만 그런 게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주택비상사태 선포를 검토 중인데 여기에도 주택 공급 확대, 건축 규제 완화, 건설비 절감 방안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민주당도 기조는 다르지 않다. 민주당 대권 주자로 꼽히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주지사는 최근 버스와 지하철 환승역 근처에 더 많은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법안에 서명했다.
좌파 성향의 영국 노동당도 공급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야당 대표 때부터 “나는 임비(Yes In My Backyard)”라며 대규모 주택 공급을 약속했다. 주택 건설을 가로막는 규제를 불도저로 밀어 버리겠다고도 했다. 집값과 임대료 안정을 위해선 집을 더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엔 안 된다’는 님비(NIMBY)와 반대되는 ‘임비’는 이미 영미권에선 주택 정책의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호주에서도 집권 노동당의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가 “주택 구매든 임대주택 거주든 비용을 낮추는 핵심은 공급”이라며 공급 확대에 힘을 싣고 있다.
집값을 잡기 위해 세금과 대출 규제 같은 수요 억제에 매달리는 정부를 다른 선진국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같은 규제가 있긴 하지만 이는 부동산 정책이라기보다 금융안정 대책 성격이 강하다. 게다가 이런 정책은 임대료 상승과 주택 부족을 부추길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올해 1월 펴낸 한 보고서는 그런 경고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아일랜드의 2015년 모기지 규제를 분석했다. 당시 아일랜드는 주택 구매 때 집값의 최소 20%를 계약금으로 걸도록 하고 소득 대비 대출 한도를 3.5배로 제한했다. 이후 임대료는 3~4% 상승했지만 주택 가격은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무주택 서민과 청년층이 최대 피해자가 됐다.
그나마 집값이 제자리걸음을 하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더 가혹할 때가 많다. 우리는 이미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수요 억제로 집값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뼈아프게 경험했다. 눌러도 잠시뿐, 집값은 나중에 더 강하게 튀어 오르고 ‘이러다 집 못 살라’는 불안 심리만 커지는 걸 지켜봤다. 그런데도 이재명 정부 부동산 대책은 여전히 수요 억제 위주다.
노무현·문재인 정부는 세금으로 집값을 잡으려 했지만 이재명 정부는 대출을 주 무기로 쓴다는 차이가 있지만 지금까지 결과는 오십보백보다. 현금 없이 집을 사기가 어려워지자 전월세 시장은 더 불안해지고 있다.
정작 정부·여권 인사 상당수는 서울 노른자위에 산다. 주택 주무부처 고위 공직자는 갭투자를 해놓고 국민에겐 “갭투자 말고 집값이 떨어지면 사라”고 염장을 질렀다. 자신들은 하지 않고, 하기도 힘든 일을 강변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공급 확대 없이 집값을 잡겠다는 건 공허한 얘기다. 괜찮은 지역에 괜찮은 집이 꾸준히 공급될 것이란 믿음을 줘야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 공급 확대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정부가 과연 가용한 공급 대책을 총동원하는지 의문이다. JP모간체이스는 미국 상원이 공급 확대 법안을 통과시키자 “상식적 조치”라고 했다. 그 상식이 한국 민주당 정부에선 잘 안 통하니 부동산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이다.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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