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대표 없는 과세 없다' 투쟁의 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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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대표 없는 과세 없다' 투쟁의 재연

미국 수도 워싱턴DC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자동차 번호판에 쓰인 구호를 보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각 주가 번호판 디자인과 주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문구를 결정한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태어나고 자라고 정치가로서 활동한 연고지인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주는 한결같이 번호판 문구에 ‘링컨’ 이름을 사용해 흥미롭다.

그런데 유독 워싱턴DC는 정치성이 농후한 슬로건을 갖고 있다. 2017년 이전까지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는 과세)이라는 평범한 사실 표현이었다면 2017년부터는 그 앞에 ‘End’(끝내라)라는 단어를 넣었고 2023년부터는 차 소유자가 ‘We Demand Statehood’(우리는 주 승격을 요구한다)는 문구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주장 강도가 점점 거세짐을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표현은 미국 독립운동 도화선이 된 1773년 ‘보스턴 티파티’ 사건 당시 쓰인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는 과세 없다)이라는 구호에서 유래했다. 당시 영국 의회는 타운센드법(1767년)과 차법(1773년)을 제정해 식민지(미국)가 갖고 있던 관세 분야 자치권을 박탈하고 관세 수입을 식민지 통치 비용에 충당하려 했다. 이에 미국인은 자신들의 대표가 입법하지 않는 ‘비민주적 과세는 독재’라고 항의했다. 보스턴 주민은 항의 표시로 보스턴 항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가 수입한 중국산 차 342개 상자를 바다에 내던졌다. 71만 명에 달하는 워싱턴DC 주민은 연방소득세를 포함해 모든 세금을 납부하지만 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상원의원 선출권을 갖지 못하고, 하원에도 푸에르토리코나 괌처럼 투표권 없는 대의원 1명만 보낼 뿐이다. 입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만을 번호판 구호로 표현하는 것이다.

미국 건국 정신에는 이처럼 조세와 관련한 대의성 요구가 뿌리내리고 있다. 1787년 제정된 미국 헌법 제1조 8항은 국민의 재산권 침해를 막기 위해 “의회가 세금, 관세, 소비세를 징수할 권력을 갖는다”며 관세가 의회의 기본 권한임을 명백히 했다. 1789년 의회가 제정한 첫 관세법도 각 상품의 구체적 관세율을 일일이 명시했다. 자메이카 증류주는 파운드당 5센트, 와인은 갤런당 10~30센트 등 매우 세부적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의회는 관세에 관한 일부 권한을 대통령에게 위임했지만, 언제나 특정 사유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제한적 위임이었다.

지난주 미국 연방대법원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1977년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원용해 광범위하게 부과한 ‘상호관세’ 조치의 합법성을 가리는 심리를 시작했다. 앞서 1심 국제무역법원과 2심 연방항소법원에서 피고 측인 행정부는 관세는 조세가 아니며 IEEPA가 국가비상사태 시 허용한 ‘수입 규제’의 집행 도구에 해당한다는 광의의 해석을 주장했다. 그러나 두 법원은 IEEPA에 ‘관세’가 명시돼 있지 않다는 협의의 해석을 내려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의 고유 권한을 침해했다고 판시했다. 보스턴 티파티와 워싱턴DC 번호판의 외침이 재확인된 셈이다. 사건의 본질은 정부 권력 구조와 정치 질서이며 건국 정신이 담긴 입법부의 조세권과 헌법의 3권 분립 원칙, 견제와 균형의 문제인 것이다.

대법원 판결이 어느 쪽이든 그 후폭풍은 미국 정치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질서에도 큰 충격을 줄 것이 분명하다. 행정부가 승소한다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의 제도화, 자유무역 질서 종말을 예고할 것이다. 패소할 경우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플랜B’를 공언했듯이 보호주의 성향의 기존 법률, 즉 1962년 무역확장법 232조(국가안보 관세), 1974년 무역법 301조(불공정 무역 관행 제재), 1930년 관세법 338조(보복 관세) 등 의회가 명시적으로 위임한 법적 수단을 총동원할 태세다. 다만 ‘해방의 날’(4월 2일) 발표처럼 무역적자 같은 단순한 논리에 입각한 관세 부과가 아니라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만큼 자의성은 줄어들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상호관세율 조정을 놓고 힘든 씨름을 벌인 우리 정부는 또 다른 불확실성과의 싸움을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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