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재정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리처드 머스그레이브는 재정의 임무를 거시경제의 안정, 효율적 자원 배분, 공정한 분배로 정리했다. 그는 재정을 단순한 돈의 흐름이 아니라 공동체가 원하는 공공가치를 실현하는 장치로 봤다. 그런 관점에서 지방분권은 예산을 지방에 더 배분하는 행정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 문제를 지역이 스스로 진단하고 해결책을 설계하며 그 결과에 대해 주민에게 책임을 지는 새로운 사회 계약의 문제다.
한국 지방자치는 1991년 부활한 이후 주민의 요구에 더 가까운 정책과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요구받아 왔다. 최근에는 지방소멸 위기까지 닥치면서 지방정부의 역할은 복지와 돌봄, 산업 전환, 지역 활성화까지 넓어졌다. 이에 따라 지방소비세 인상 등 재정분권이 추진됐고, 지방정부가 사용할 재원의 규모도 늘었다. 하지만 돈이 내려왔다고 신뢰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재정분권은 책임분권이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결산과 감사다. 지금의 지방 행정은 지방자치단체와 복수의 중앙부처, 산하기관, 민간위탁기관 등이 사업을 함께 수행하는 ‘공동 생산’이 일상화됐다. 이런 구조에서 예산이 어디로 흘렀는지, 약속한 성과가 달성됐는지, 민간 파트너가 비효율적으로 예산을 지출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검증하지 않으면 지방정부의 재정지출은 신뢰받을 수 없다. 지방의회의 결산심사 및 감사가 지방자치 민주주의의 마지막 안전장치가 되는 이유다.
하지만 결산은 한 해를 정리하는 행정적 보고서 취급을 받고, 감사는 형식적 지적과 개선 요구 정도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대로라면 지방으로 이전된 예산의 사용 근거와 효과를 지방의회나 주민이 충분히 들여다보기 어려운 구조가 굳어진다.
재정 투명성과 성과 책임을 제도화하는 일은 지방 분권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재정의 자율성이 커질수록 지방의회의 회계적 감시 역량은 민주적 정당성 그 자체가 된다. 여기서 지방의회의 역할이 관건이 된다. 지방의회는 예산안을 심사하는 기관을 넘어 결산을 통해 집행부의 사용 내용과 성과를 따지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회계와 계약, 성과지표를 읽어낼 전문성이 쌓여야 한다. 이는 외부감사와 지방의회가 결합한 구조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국 지방정부는 이 지점을 제도화했다. 중앙에서 독립된 기구가 지정한 외부감사인이 지방정부의 회계정보와 집행의 적정성을 점검하고, 그 감사보고서를 지방의회와 주민에게 공개한다. 지방의회는 보고서를 근거로 집행부를 추궁하고 시정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신뢰할 만한 숫자’와 ‘그 숫자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함께 움직인다. 한국도 이제 다음 질문들을 피해 갈 수 없다. 우리는 지방정부를 신뢰할 준비가 돼 있는가. 그렇다면 그 신뢰를 떠받칠 검증 장치는 충분한가.
재정분권의 다음 단계는 더 많은 재원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검증 절차다.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가 지방분권의 핵심 원칙이 돼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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