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한 사회의 정설을 따르고 지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에선 그곳의 정설인 공산주의를 따르고 지킨 사람들을 보수라 불렀다. 우리 사회의 정설은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시장경제 체제이므로, 자유주의자들이 보수라 불린다.
정설을 따르고 지키는 보수가 다수면, 사회가 안정적으로 움직인다. 이설에 끌리는 세력이 다수가 되면, 사회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정설인 자유주의에 대한 믿음이 작고, 이설인 전체주의에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이는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했다. 이럴 때 사회는 불안해지고 비효율이 커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이끄는 이재명 대통령은 처신이 참으로 어렵다. 헌법에 구현된 정설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떠받들어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데, 자신과 추종 세력의 믿음은 그런 정설과 거리가 있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는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 실제로 대통령이 되면, 누구나 바뀐다. 먼저 자신이 맡은 책무의 성격과 중요성이 그의 태도를 바꾼다. 이어, 대통령만이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 그의 안목을 바꾼다. 자연히 우리 사회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대통령이 정권 안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점을 인상적으로 보여줬다. 원래 사회주의자였지만, 집권한 뒤엔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경제에선 주류 경제학 이론을 따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를 극복했다. 외교에선 일본과 어려운 협상 끝에 어업협정을 맺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줄곧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설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드러냈다. 하지만 나라를 실제로 이끌게 되자, 그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상(FTA)을 주도하고 이라크에 파병했다. 여당에서 격렬한 거부 반응이 나왔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을 밀고 나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런 변신의 폭이 아주 작았다. 실제로 그는 외교와 안보에서 거듭 문제적 결정들을 내렸다. 그의 이력이 그를 북한의 압력에 직접적으로 노출시켰다는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놀랍지 않게도, 그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비해 크게 낮다. 따라서 그의 경우는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라 할 수 있다.
지금 이재명 대통령은 예상 밖으로 대담한 변신을 시도한다. 안미경중(安美經中)이란 구호가 상징하는 어정쩡한 태도에서 벗어나 미국 중심의 질서를 확고히 지지하는 정책을 선언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만큼 과감한 변신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전임 정권의 정책을 그대로 승계하겠다고 선언해서, 외교 환경을 안정시켰다. 그는 자신의 이런 변신을 실용주의라 부른다.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에 따르면,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에 된다(It works because it is true)’와 ‘그것은 되기 때문에 진실이다(It is true because it works)’ 사이엔 차이가 없다. 실용주의의 이런 관점을 따르면 자연스럽게 구체적 경험과 개별적 결과를 중시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정설을 전적으로 신봉하지 않는 좌파 대통령이 실용주의를 따른다면, 자신의 직무에 대해 현실적 접근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세력들은 정당을 통해서 의지를 구현한다. 자연히 대한민국의 보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따르는 정당인 국민의힘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구현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국민의힘은 무거운 책무에 비겨 능력이 아주 작다. 무엇보다도, 깊이 분열됐다. 분열의 근본적 원인이 ‘선거 부정’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했으므로, 긴 세월이 지나야 다시 통합될 테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야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현실적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 일에선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움직일 공간을 마련해준다. 정설에 되도록 충실한 정책을 위해 실용주의를 택한 이 대통령으로선 여당 강경파의 저항이 힘겹다. 따라서 국민의힘의 합리적 전략은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적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일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초당적 지지’보다 더 큰 호소력을 지닌 말은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