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늑대 무리가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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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늑대 무리가 몰려온다

전 세계 행동주의 펀드가 먹잇감을 찾아 일본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이다. 판을 깔아준 것은 일본 정부였다. 일본은 아베 신조 전 총리 집권기이던 2014년부터 주주 친화적인 자본시장 밸류업 정책을 추진했다. 기업 거버넌스 코드를 제정해 기업 경영진에 주주 이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했고, 배당 자사주 매입 등 주주 환원을 늘리도록 압박했다.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도 신설된 스튜어드십 코드에 맞춰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를 지지했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물 만난 고기가 됐다. 2015년 10건이던 행동주의 펀드 활동 건수는 2019년 60건으로 불어났다.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들이 기업의 장기 성장성은 안중에 없는 ‘늑대 무리’(wolf pack)라는 것을 일본 국민이 깨달은 것은 한참 뒤다. 엘리엇매니지먼트 등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가 떼를 지어 자국 전자산업의 상징인 도시바를 물어뜯는 것을 목도하면서다. 그 후유증은 컸다. 일본 기업들이 용도 폐기하다시피 한 포이즌필 등 경영 방어책을 다시 꺼내 들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다.

10년 전 일본을 소환한 것은 요즘 한국 주식을 열심히 사들이고 있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드는 여러 생각 때문이다. 최근 외국인 매수세는 최근 4~5년간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이다. 그 열기가 원동력이 돼 한국 증시를 새로운 영역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외국인들의 국적 비중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유럽계 자금이 확 늘었다. 특히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영국령 케이맨제도와 같은 조세회피지역의 헤지펀드 자금이 많이 들어온다. 지난달 유입된 외국인 자금의 3분의 1 이상이 이 지역에서 왔을 정도다. 그리고 그 자금 경로를 따라 늑대 무리도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최근 LG화학을 대상으로 행동에 돌입한 팰리서캐피털이 그렇다. 운용업계에 따르면 이 행동주의 펀드는 7~8월께부터 주식을 은밀히 사들였다. 국내 증시에 외국인의 순매수세가 본격화한 시점이다. 몇 달간 모습을 숨기던 팰리서캐피털은 지난 21일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담보로 자사주를 사들여 소각하라” “이사회를 개편하라” 등의 공개 제안을 던지며 본색을 드러냈다.

행동주의 펀드가 늑대 무리라고 불리는 이유는 은밀하게 움직이고 집단으로 공격하는 특유의 행동 패턴 때문이다. 이들은 2~3곳이 서로 연대해 공격 대상으로 한 곳으로 정하고, 각자 지분을 사 모은다. 5% 이상 지분 보유에 따른 보고 의무와 소송 리스크를 피하고 경영진의 방어를 무력화하기 위해 서로 관련이 없는 척 행동하다가 특정 시점이 되면 빠르게 뭉쳐 실력 행사에 나선다.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팰리서캐피털은 시작일뿐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행동주의 펀드들이 국내 운용사에 협업을 요청하는 사례가 최근 부쩍 늘고, 컨설팅 의뢰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국내 증시 상황은 행동주의 펀드에 다시 없을 기회다. 정부 여당이 증시를 밸류업하겠다며 행동주의 펀드들에 전례 없이 우호적인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기업 경영진이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에게도 충실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한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소액주주들이 기업 경영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권고적 주주제안권’을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이 주주 권익을 제대로 챙기고 있는지 기관투자가들이 잘 감시하도록 스튜어드십 코드도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

정부 여당은 한쪽에선 기업 경영진의 힘을 빼는 조치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사외이사 감사위원을 선임하거나 해임할 때 대주주의 의결권 한도를 3%로 제한하고, 주주총회에서 집중투표제도 의무화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기업 보유 자사주를 강제로 소각하도록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 기업이 행동주의 펀드에 맞설 유일한 방어 수단으로 활용해온 자사주마저 무용지물이 될 판이다. 자본시장 혁신도 좋지만 기업 경영의 지속 가능성을 해칠 수준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 일본 기업들은 늑대들이 몰려올 때 포이즌필이라도 있었지만 지금 국내 기업들은 맨몸이다. 늑대들이 어느 순간 우리나라 대표 기업을 향해 한꺼번에 이빨을 드러내면 그땐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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