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투항으로 더 커진 3500억 달러 투자 압박
美 노동층 “백인국가 정체성 잃었다” 한탄
美 진출 한국기업이 노동자 파트너가 되어야
일본은 자국에 중요한 자동차 수출 관세를 낮추기 위한 통 큰 양보였다고 설명하지만, 그것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굴기한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 미국에 줄을 다시 선 것이다. 일본은 중국과 손잡은 역사도 없고, 손잡을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는 만큼 미국은 생존의 동아줄이다. 같은 이유로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협정에 합의했다. 그때도 미국은 ‘대미 무역흑자가 너무 크다’며 일본을 찍어 눌렀다. 한국은 이러기가 어렵다. 미국의 절대적 안전보장 속에 국방비를 크게 절약해 산업 성장의 디딤돌로 삼았던 것은 일본과 똑같지만,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평가가 좌우 정부가 바뀔 때마다 번번이 달랐다.
미국이 장기적으로 이익의 90%를 갖겠다는 건 투자의 ABC도 못 지킨 부당한 요구다. 트럼프 특유의 욕심이 작용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론 트럼프 지지 백인 노동자 그룹의 ‘외국적인 무언가’에 대한 거부감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늘 정체성을 묻는다. 현재까지도 뜨거운 질문은 두 가지다. 질문①은 ‘어떤 기업이 더 미국에 도움 되나(Who is us?)’라는 1990년 논문에서 시작됐다. 당시 미일 양국의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인 IBM의 일본법인과 후지쓰(富士通)의 북미법인을 예로 들어보자. 클린턴 정부의 노동장관이었던 로버트 라이시는 “기업의 국적은 부차적인 문제다. 미국 땅에서 고용하고 훈련시키고 세금 내는 회사(후지쓰USA)가 (IBM저팬보다) 미국에 더 기여한다”는 주장을 폈다. 국제주의 시각을 지닌 고학력 엘리트층의 생각이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의 삼성 SK 등을 향한 투자유치 보조금은 이런 시각에서 가능했다.질문②는 정반대 생각을 담고 있다. ‘우리 미국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Who are we?)’는 것으로, 새뮤얼 헌팅턴은 2004년 이 질문을 제목으로 달아 책을 썼다. 미국은 250년 전 건국 때부터 앵글로색슨 기독교인의 나라였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라틴계 아시아계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백인 국가의 정체성을 잃어갔다는 이들의 주장을 정연하게 정리했다. 트럼프식 반이민 정서의 출발점이다.
저학력 백인 노동자의 눈에는 한국인이 소유·경영하고, 이익을 챙겨가는 미국 내 투자회사는 아무리 잘 봐줘도 한국 회사다. 이런 회사가 미국에 좋은 것이라는 ①번식 생각은 딴 세상 사람들 이야기로 치부한다. 바이든이 약속한 보조금을 백지화하겠다는 약속 파기가 그래서 나왔다. 조지아주 사태처럼 미국 노동자를 쓰지 않은 채 한국서 기술자를 데려다가 공장을 지었으니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②번 관점에 따라 노동자 계층은 자신들을 세계화의 피해자로 여긴다. 외국 기업과 노동자가 두렵고(恐·공), 방어적으로 국경에 장벽(壁·벽)을 쌓고, 외국인은 물론 미국 내부의 다른 정치적 의견에 대한 화(怒·노)를 내고 있다. 대통령실은 길고 어려운 협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기업은 자동차 관세 25%는 물론이고 모든 대미 수출품에 25% 상호관세를 지금처럼 계속 내야 한다. 15%를 적용받는 일본이나 유럽연합과 더 힘든 경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간이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 투자 총액이나 투자 방식에서 우리 경제력에 걸맞은 절충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기대한다.그러자면 정부는 트럼프 정부 협상 대표를 상대하는 것 못지않게 ②번 믿음을 갖는 백인 노동자 집단의 마음을 얻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미국 조선산업 부흥은 한국 기업과 미국 노동자가 함께 만드는 것이고, 수십 년 전 미국이 한국인 의사, 엔지니어를 하나하나 교육시켰던 것처럼 한국도 미국인 블루칼라 노동자의 경쟁력과 삶의 질 회복에 핵심 파트너가 기꺼이 될 것이란 점을 설명해야 한다. ①번식 사고가 영 틀린 게 아니란 걸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관심 두지 않던 미 러스트벨트 지역을 향한 공공외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의 공벽노(恐壁怒)를 품어야 길이 보일 것이다.
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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