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심혈관 분야 혁신 의료기기를 도입하는 국가였다. 국내 의료진은 발 빠르게 도입한 의료기기 사용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인도네시아 등 다른 아시아 국가 의사에게 지식을 공유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필자도 2012년부터 좌심방 폐색술 기구 등을 빨리 도입해 여러 국가에서 시술을 돕고 경험을 나눴다.
하지만 최근 5년 새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예를 들어 승모판 폐쇄부전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승모판 클립 시술(MitraClip)은 2003년 전 세계에서 처음 시술이 진행돼 2008년 EMA, 2013년 FDA 승인을 거쳐 현재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널리 시행되고 있다. 국내에는 2020년에야 도입됐고, 현재도 일부 기기는 수입되지 않아 제조사에 부탁하는 상황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삼첨판 폐쇄부전 클립 시술이나 경피적 삼첨판막 삽입술(TTVR) 등 최신 치료법이 여러 국가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지만 국내에는 아직 도입 일정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의료기기 제조사들은 한국을 우선 고려해 도입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협의했지만 현재는 일본, 중국, 호주 등에 먼저 도입하고 한국은 검토 대상에 머물 때가 많다.이런 변화는 단순히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한국은 뛰어난 의료 인프라와 숙련된 의료진을 바탕으로 첨단 의료기기 도입의 선두 주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높은 규제 장벽과 불합리한 보험 정책, 보상 체계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들이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을 낮추고 있다.
관상동맥석회 병변에 대한 쇄석 기구(IVL), 심부전 환자를 위한 순환 보조장치인 임펠라(Impella) 등도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최근 한 학회에서 좌장을 맡으면서 방글라데시 의사들이 이 같은 기기를 사용해 사례를 발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도 해당 기기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은 의료기기 사용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 있는 데다 의료진의 전문성 저하, 환자의 치료 기회 상실, 의료산업 경쟁력 약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다음과 같은 개선안이 필요하다. 먼저 안전성을 유지하되 글로벌 기준에 맞춘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의료기기 허가 프로세스를 구축해야 한다. 다음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효성과 안전성이 확보된 의료기기의 조기 도입을 위한 ‘패스트트랙’ 제도를 마련하고 비용 절감을 위한 건강보험 등재 절차 개선도 필요하다. 또 국내 의료 인프라와 임상 역량을 기반으로 글로벌 의료기기 제조사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한국을 테스트베드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기기를 임상에 적용하기 위해 의료진 교육과 다학제 협력 체계도 활성화해야 한다.김중선 연세대 의대 내과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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