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도쿄 부동산 시장
장기침체 벗어난 日 아파트값 상승세… 도쿄 핵심지 폭등, 양극화 현상 뚜렷
규제 완화 후 대형 재개발들 속도… 도시 매력 상승 외국인 투자 몰려
내 집 마련 멀어진 서민들 불만 커지자… 5년 전매 제한, 해외 투자 규제 거론
대단지 아파트가 흔한 한국과 달리 일본의 아파트 격인 맨션은 주로 1, 2개 동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때 선수들 숙소로 쓰였던 ‘하루미 플래그’는 이후 분양과 임대를 거쳐 5000채가 넘는 대단지로 바뀌었다.
현지 부동산 중개인은 “분양 후 5년도 안 됐지만 맨션 가격이 두 배가 됐다”면서 “일본의 ‘파워 커플’(고소득 맞벌이 가구)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비롯해 외국인들도 투자용으로 많이들 산다”고 했다. ‘지금이 꼭짓점은 아니냐’고 묻자 그는 회사 내부 자료라면서 인근 부동산 재개발 계획과 대형 맨션의 입주 시기를 정리한 문서를 보여주며 투자를 권했다. 그는 대뜸 “암에 걸린 적 있냐”고 묻기도 했다. 일본 은행들은 재무 상황뿐 아니라 건강 상태도 체크해 대출을 해주니 참고하란 얘기였다.
● 아베 규제 완화 이후 투자 몰리는 도쿄
도쿄 일극 현상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 안팎에선 최근 집값 급등의 배경에는 외국인 효과가 꼽힌다. 외국인 방문객과 해외 투자 자금이 몰려들면서 도쿄의 집값이 특히 들썩인다는 것이다.
미쓰비시UFJ은행이 부동산 관련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난해 7∼12월 신축 주택의 판매 실적 조사를 보면 해당 기업 13곳 가운데 9곳이 지요다구, 시부야구, 미나토구 등 도쿄 핵심지 맨션의 구입자 가운데 외국인 비율이 20% 이상이라고 밝혔다. 5곳은 30% 이상이라고 했으며, 한 곳은 절반 이상이 외국인 매수자라고 답했다.
일본 정부 차원의 명확한 실태 조사는 아직 없지만, 도쿄 부동산 구매자 가운데 상당수는 중국인이며 한국인 투자도 적지 않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실제 일부 부동산회사들은 한국인 투자자를 대상으로 약 250만 원에 2박 3일 일정의 부동산 임장 패키지를 진행하고 있다.
도쿄의 집값 상승은 건축비와 인건비가 상승하는 전 세계적 현상 외에도 토지의 부족, 엔저 현상에 느슨한 대출규제, 최근 증시 호황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2012년 아베 신조 정권 출범 뒤 내걸었던 ‘대규모 금융 완화, 적극적인 재정정책, 과감한 성장전략’이 10여 년 지난 지금에도 도쿄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현지 부동산회사인 주리얼에스테이트의 조민수 대표는 “아베 정부가 10여 년 전 펼쳤던 규제 완화 및 외국인 자본 유입 정책을 통해 결국 장기간 정체됐던 도심 대형 재개발이 가능했다”면서 “그것들이 속속 준공되며 외국인 관광객 급증, 상업시설 가치의 증대, 이에 다시 투자가 확대되는 선순환이 그려지며 기대치가 커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모습은 7월 3일 찾은 도쿄 미나토구의 ‘모리빌딩 어번랩’에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롯폰기힐스’ ‘아자부다이힐스’ 등 대형 재개발을 성공시킨 모리빌딩은 도쿄의 건물과 도로 등을 실제 크기의 1000분의 1로 축소해 만든 모형을 통해 대규모 개발 현황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모리빌딩 관계자는 “여러 재개발을 통해 도쿄의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외국인 매매에 추가 세금도 검토
문제는 이런 도쿄의 지가 상승 때문에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진 서민들이 월세 시장으로 내 몰리면서 주거비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4일 일본 부동산중개업체 앳홈(AT Home) 자료를 인용해 도쿄 23구에 거주하는 임차인의 소득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34%라고 했다. 신문은 “소득 대비 월세 비율은 25∼30%가 한도치라고 보는데 이를 넘어서는 상황은 가계에 심각한 리스크”라고 했다. 아사히신문은 4일 합산 연봉이 2000만 엔(약 1억9000만 원)인 30대 부부가 1억5000만 엔(약 14억1000만 원)을 대출받아 1억6000만 엔(약 15억 원)짜리 맨션을 분양받은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금리가 조금만 올라도 위태로운 ‘영끌’에 나선 셈이다.
‘버블 위기감’이 커지자 도쿄 지요다구는 7월 외국인 매매 실태에 대한 자체 조사에 나서는 한편으로 부동산협회에 신축 맨션의 전매를 5년간 금지하는 특약 사항을 신설할 것을 권고했지만, 협회는 “합리적인 규제인지 의심된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본인이 열심히 일해도, 도쿄(23구)에 집을 가질 수 없다는 건 문제”라고 했다. 국토교통성은 외국인의 부동산 구매 현황을 조사 중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시장 정상화 방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야당인 국민민주당은 매매 후에도 입주하지 않은 집에 ‘빈집세’를 매기는 것을 추진 중이고, ‘일본인 퍼스트’를 앞세운 참정당은 외국인이 부동산을 살 경우 추가 세금을 부과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이들 두 당은 외국인 부동산 규제 공약 등으로 지난 참의원 선거에서 동반 약진했다.
황인찬 도쿄 특파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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