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 갇힌 봄빛[이준식의 한시 한 수]〈340〉

1 week ago 7

그 옛날 미모 탓에 화를 당했으니, 단장하려 거울 앞에 다가가도 마음이 내키지 않네.

총애가 외모에 달린 게 아닌 터에, 이 몸이 왜 치장을 한단 말인가.

따스한 바람에 새소리는 요란하고, 해가 높이 뜨자 꽃 그림자 겹겹이 드리웠네.

해마다 월계 냇가 모이던 아가씨들, 연꽃 따던 그 시절 그립기만 하여라.

(早被嬋娟誤, 欲粧臨鏡慵. 承恩不在貌, 敎妾若爲容.

風暖鳥聲碎, 日高花影重. 年年越溪女, 相憶採芙蓉.)―‘봄날 궁녀의 원망(춘궁원·春宮怨)’ 두순학(杜筍鶴·약 846∼904)

궁궐이라는 화려한 무대의 허상 앞에 선 여인. 미모 때문에 궁에 들어왔지만, 그것은 행운의 열쇠가 아닌 족쇄였다. 치장이 무의미하다는 체념에 화장하려던 손길을 멈춘다. 울적한 마음과는 딴판으로 창밖은 화사하기 그지없다. 따스한 봄바람 속에 새소리는 왁자지껄 부서지고 햇살 아래 꽃 그림자는 겹겹이 드리운다. 세상은 저리도 환하기만 한데 슬픔은 오히려 배가한다. 급기야 소환되는 지난날 고향에서의 추억들. 친구들과 어울려 연꽃을 따던 시절, 노래와 웃음으로 가득했던 그 순간들이 궁중의 화려함보다 더 선연하게 아로새겨진다. 자유의 기억이 아름답게 느껴질수록 현재의 비극은 더욱 날카롭게 다가선다. 도무지 위로가 될 수 없는 추억이기에 더 심란해진다. 시는 궁녀의 원한을 차용한 시인의 자화상이다. 유능한 인재가 벼슬길에서 잊히는 현실은 미녀가 총애를 잃는 운명과 다르지 않다. 봄빛 같은 삶을 꿈꾸면서 사대부들은 그 빛의 소재를 찾아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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