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정책, 이대론 추격자 신세…정부가 1등상품 만든단 착각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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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는 추격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며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은 미래 산업을 위한 기초 과학기술을 대비하는 데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종현학술원 제공

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는 추격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며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은 미래 산업을 위한 기초 과학기술을 대비하는 데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종현학술원 제공

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한국 과학기술계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가진 학자다. 대통령이 의장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구성원으로 두 차례 참여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위원, 문재인 정부에선 부의장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국가 연구개발(R&D) 정책 수립 과정과 예산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학자와 관료 사이 영원히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은 ‘회색 지대’를, 그것도 진보·보수 정부에서 두루 경험한 이가 염 교수다. 그는 이재명 정부에서도 최근 국정기획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합류했다. 염 교수는 13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선택과 집중 전략을 폐기해야 한다”며 “관료가 선택한 영역에 R&D 예산을 ‘몰빵’하는 방식으로는 추격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세상이 온통 인공지능(AI) 얘기뿐인 것 같습니다.

“AI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는 맞죠. 하지만 수준 있는 정책 논의가 실종된 채 정신없이 대선을 치렀고, 새 정부의 대선 공약집을 봐도 당면한 문제에 대한 대응은 나와 있지만 국가 R&D 정책의 근본적이고 큰 비전은 보이지 않더라고요.”

▷어떤 점을 우려하고 있나요.

“현안 해결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럴수록 혁신하고 미래를 준비하기는 더 어려워질 거예요.”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일까요.

“과학기술 정책과 산업 정책을 혼동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에요. 국가 과학기술 정책이라고 하면 국민 건강, 에너지, 통신, 첨단·주력·신성장 산업, 인력 양성, 지역 발전 등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만큼 과학기술 정책이 중요하다는 얘기 아닙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 많은 정책은 각각 보건, 에너지, 통신 인프라, 산업, 인력 양성, 지역 균형 발전 정책 등으로 분류되는 별도의 예산 항목으로 집행됩니다. 미·중 패권 경쟁에 대한 정책은 외교, 안보, 경제, 산업 정책으로 대응하죠. 사실 AI 정책도 많은 부분 경제, 산업 정책에 해당합니다.”

▷과학기술 정책은 무엇을 다룹니까.

“국가 정책 수행은 예산에 의해 결정됩니다. 쉽게 말해 우리에게 주어진 국가 과학기술 R&D 예산 약 30조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가 논의의 핵심이 돼야 해요.”

▷국정기획위도 이런 점을 고려하고 있을 텐데요.

“자문위원 자격으로 뒤늦게 참여해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국가 연구지원 체제의 복원과 R&D 예산의 안정화를 넘어 앞으로 어떤 R&D 정책이 필요한가’라는 좀 더 중요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단지 ‘망가졌으니 고쳐야 한다’거나 ‘예산이 줄었으니 다시 늘려야 한다’는 요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 R&D 정책이 정권 교체에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정책이 요동치는 근본 원인은 국가 R&D 정책의 목적과 비전이 뚜렷하지 않은 데 있죠. 과학기술이 5년간의 경제 운영을 위한 것이라면 정부가 기초과학에 투자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정부 입맛에 따라 과학기술 정책이 좌우된다는 얘기군요.

“정부가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는 잘되는 경우보다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설하고 활용조차 안 되는 대형 설비도 수두룩합니다. 수백, 수천억원짜리 프로젝트가 널려 있어요.”

▷어떤 사례가 있습니까.

“포항 가속기연구소에 극자외선(EUV) 가속기라는 게 있어요. 초정밀 반도체를 제조할 때 필요하다고 해서 약 300억원을 들여 문재인 정부 때 만든 건데 작동조차 못 하고 있어요. 제 포스텍 연구실 창문으로 바로 보입니다. 한국엔 EUV 부품을 만들 기업도 거의 없는데 예산을 투입한 겁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해 2조원 가까이 소요된 중이온 가속기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거의 재앙 수준이죠.”

▷세계 일류를 만들자고 시작한 일들 아닌가요.

“얘기 나온 김에 우주 발사체를 예로 들어볼게요. 스페이스X처럼 우리도 해 보자는 건데, 수십조원을 투입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다고 스페이스X보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나요. 백번 양보해서 재사용 발사체를 개발한다고 칩시다. 무엇을 위해서 하냐고 물어보면 ‘달에 보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달에 가서 뭘 연구할 거냐고 물어보면 (극저온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헬륨-3 같은 자원을 가져오겠다고 해요. 상업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달이 그렇게 중요하면 우리가 잘하는 탑재체 만들어서 지금이라도 상용 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리는 게 낫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됩니까.

“정부가 세계 1등 상품을 만들겠다고 하고, 그걸 또 정부에 요구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에요. 세계적으로 1, 2등이라고 하는 기술 중에 국가가 개발한 게 있나요? 심지어 관 주도의 나라인 중국에서도 AI 혁명은 딥시크라는 민간 기업이 이끌고 있잖아요.”

▷정부가 마중물을 넣긴 해야 할 텐데요.

“그 마중물 역할이란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민간 기업과 대비되는 국가 과학기술 R&D의 목표와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립조차 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모두 다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 사달이 난 겁니다. 방향성과 전략 없이 돈만 쓰는 데엔 진보, 보수 구분도 없어요.”

▷재밌는 분석인 것 같습니다.

“지난 10년간 큰 틀의 과학기술 정책을 결정하는 데 가까이 있으면서 깨달은 겁니다. 산업화 시대가 종료하고, 소위 혁신의 시대가 된 마당에 보수와 진보 모두 자기반성 없이 똑같은 산업화 시대의 전략을 반복하고 있어요. 관료가 주도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 말입니다.”

▷왜 잘못된 전략이라고 평가하나요.

“말을 바꾸면 미국이나 유럽, 혹은 중국 등 세계 1등이 잘하고 있는 기술 중 몇 개를 선택해서 열심히 추격하자는 것이 선택과 집중 전략이에요. 영원히 추격자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AI가 중요하다는 걸 누가 모르나요. AI 정책 잘하겠다는 건 어떤 정부든 말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과학기술 R&D는 AI 다음 혁신의 파도에도 준비해야 한다는 거예요.”

"과기정책, 이대론 추격자 신세…정부가 1등상품 만든단 착각 버려야"

▷국가 R&D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통제할 수 있는 국가 R&D 예산이 실제로 얼마인지를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저는 30조원 중에서 7조원 정도라고 봅니다. 나머지는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 유지 등에 필요한 일종의 고정비예요. 이걸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일괄 삭감에 저항이 컸던 것도 그래서군요.

“이 가운데 4조원을 한꺼번에 줄였더니 시쳇말로 난리가 나잖아요. 그 정도로 대학, 연구소들이 사망 직전까지 갔어요. 이런 상황에서 전체 예산의 상당 부분을 반도체나 AI에 몰아줄 수 있을까요.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은 어쩌고, 2차전지는 또 어쩌려고요. 지금 AI산업계에선 정부 R&D 자금에서 조 단위 돈이 쏟아질 것으로 기대할 텐데 정말 많아 봐야 수천억원일 겁니다. 조 단위가 되려면 민간 기업이 돈을 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합니까.

“유럽연합(EU) 집행부가 과학기술 정책 목표를 제시한 걸 참조할 만합니다. 수준 높은 기초 연구, 인류 대전환에 필요한 공공기술, 유럽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위한 과학기술에 투자하겠다고 천명했어요. 특히 세 번째가 우리한테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장 급한 먹거리에 투자하겠다는 것인 데 비해 EU는 미래에 나올 산업의 기초 과학기술에 투자하겠다는 얘기거든요. 기초, 공공, 산업의 균형이 잘 잡혀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요.

“제가 일본 대학에서 교편도 잡고, 지금도 일본 정부의 물리학회 정책 수립에 일부 관여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지난 25년간 쇠락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장점을 누구보다 절감했어요. 한국 사람은 누구나 과학기술이 잘돼야 국가가 잘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의 장점이에요. 과학기술 입국이라는 한국인 뇌리에 박혀 있는 이 엄청난 무형자산을 국가 리더가 최대한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영총 기자

■ 염한웅 교수는

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삼진법(0·1·2) 정보를 지닌 새로운 솔리톤 입자를 세계 최초로 발견해 차세대 인공지능(AI) 소자 개발의 전환점을 마련한 세계적 물리학자다. 솔리톤 입자는 에너지 손실과 발열 없이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냈고,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자제어 저차원 전자계 연구단 단장과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미국물리학회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펠로우로 선임됐으며 2015년 한국과학상, 2016년 인촌상 등을 수상하는 등 국내 기초과학을 대표하는 연구자로 꼽힌다.

한경·최종현학술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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