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맛을 느끼는 여행, 파리의 가을 식탁[정기범의 본 아페티]

6 days ago 5

정기범 작가·‘저스트고 파리’ 저자

정기범 작가·‘저스트고 파리’ 저자
9월, 파리는 기상 관측 이래 40년 만의 추위로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자연스레 따뜻한 제철 요리가 떠올랐고, 파리의 작은 비스트로를 찾았다. 메뉴판에서 눈에 띈 것은 ‘수프 드 포티롱(Soupe de Potiron)’. 부드럽게 끓인 호박수프에 크림과 버터를 넣어 달콤하고 풍부한 맛을 살린 요리였다. 트러플오일 몇 방울을 떨어뜨려 향이 한층 살아나고, 아삭하게 구운 작은 빵, 크루통을 곁들이면 부드러운 수프와 바삭한 식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다. 제철 재료의 신선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수프는 단순한 전채를 넘어, 가을 파리 식탁의 시작을 알리는 환영사와도 같았다.

가을은 또한 버섯의 계절이다. 프랑스에서 세프는 ‘숲의 왕(Le roi des bois)’으로 불릴 정도로 사랑받는 버섯이다. 남서부 도르도뉴, 오베르뉴, 보르도 근처가 대표 산지이며 둥글고 통통한 반구형의 4cm 내외 크기와 구운 견과류 향, 약간의 단내가 어우러진 깊은 감칠맛이 특징이다. 포르치니는 뵈프 부르기뇽이나 리조토 같은 풍미가 강한 요리에 활용하면 맛이 극대화된다.

조금 더 섬세한 맛을 지닌 지롤 버섯은 여름 말에서 가을 초, 프랑스 전역의 자작나무숲에서 수확된다. 은은한 감칠맛 덕분에 버섯수프, 크림소스 파스타 등 다양한 요리에 활용된다. 버터와 마늘, 파슬리로 살짝 볶거나 달걀과 함께 오믈렛으로 즐기면 제철 버섯의 향을 가장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프랑스인들은 계절과 산지를 따져 버섯을 선택하고, 식재료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존중을 그대로 요리에 담아낸다.

가을 파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별미는 ‘마그레 드 카나르 오 미엘(Magret de Canard au Miel)’이다. 오리 가슴살을 바삭하게 구운 뒤, 속은 로제 스타일로 핑크빛을 살리고, 발사믹이나 포도소스로 글레이징해 달콤하면서도 진한 풍미를 더한다. 과일향이 풍부한 보르도 생 테밀리옹이나 포므롤의 메를로 와인과 잘 어울리며, 제브레 샹베르탱 같은 피노 누아르 부르고뉴 와인도 훌륭한 페어링이 된다. 화이트 와인을 선호한다면 꽃 향과 살구 향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비오니에 품종의 콩드리외를 곁들이면 오리의 풍미와 소스의 조화가 더욱 돋보인다. 요리의 질감, 단맛과 산도의 균형, 와인과의 상호작용까지 생각하면, 단순한 오리 요리를 넘어 가을 파리 미식의 정수를 경험하게 된다.

디저트로는 계절에 맞춘 사과파이가 제격이다. 얇게 썬 사과를 버터와 설탕, 계피와 함께 구워 만든 전통적인 프랑스식 디저트로, 따뜻하게 내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면 풍미가 극대화된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가을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사과파이는 디저트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인의 계절 감각과 가정식 문화를 담은 상징적인 요리이기도 하다.

파리에서 제철 식재료를 즐기는 경험은 문화 체험과 같다. 호박수프와 제철 버섯 요리, 마그레 드 카나르 오 미엘, 사과파이를 차례로 음미하는 동안 제철 재료와 계절의 맛을 살리는 프랑스인의 섬세한 미식 감각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계절성과 산지, 조리 과정, 와인 페어링까지 모두 체험하면 파리의 가을 식탁은 한 도시의 풍미와 문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여행이 된다.

정기범의 본 아페티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 내가 만난 명문장

    내가 만난 명문장

  • 정기범의 본 아페티

    정기범의 본 아페티

  • 청계천 옆 사진관

    청계천 옆 사진관

정기범 작가·‘저스트고 파리’ 저자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