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월,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처음으로 TOPIK 21회 시험을 치렀다. 그때는 시험장을 직접 고를 수 있었다. 서울 동북부의 한 대학을 선택했는데, 딱딱한 의자와 오래된 스피커 탓에 온몸이 긴장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다음 시험에서는 다른 곳을 택했고 운이 좋았다. 깨끗한 신축 건물, 조용한 에어컨까지 갖춘 환경이었다. TOPIK 시험이 작은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시험장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한 특권이었다.
당시 TOPIK 응시료는 4만 원이었다. 브라질에서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자격증을 따려면 수백 달러, 수백 유로가 필요했다. 때문에 시험을 한 번 보려면 몇 달씩 돈을 모아야 했다. 하지만 TOPIK의 응시료는 김밥 열두 줄 남짓한 가격이었다. 그래서 “TOPIK? 그냥 보면 되지!”가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나도, 유학생 친구들도 그랬다.
그 시절, 시험장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시험이 끝난 뒤 함께 점수를 예상하며 웃고 떠들었다. TOPIK을 계기로 사랑이 싹트고, 좋은 성적에 함께 기뻐하며 우정이 깊어졌다. 한국에서의 삶을 나누는 하나의 의식 같은 시험이었다.한국에 산 지 17년, TOPIK을 몇 번이나 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2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유효기간 때문이다. 그래도 매번 시험을 볼 때마다 ‘달라져 가는 나’를 확인하는 재미가 있다. 처음엔 듣기평가 도중 바늘 떨어지는 소리만 나도 집중이 깨졌지만, 이제는 문제가 너무 천천히 읽혀 집중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너무 천천히 읽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 역시 점점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다.
올해는 부산에서 TOPIK을 보게 됐다. 여행 겸 시험을 본 건 아니다. 원하는 시험장을 고르기가 어려울 만큼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티케팅이 열리는 오전 10시 정각에 접수 사이트에 접속했는데도 가까운 시험장은 이미 응시 신청이 마감된 상태였다. 그래서 서울, 인천, 수원, 울산, 심지어 제주까지…. 외국인들은 TOPIK을 위해 전국을 떠돈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암표상들이 TOPIK 접수 시스템을 선점해 웃돈을 받고 접수를 대행하는 경우도 있다. K팝 콘서트장에서 활개 치던 암표 시장이 이제는 시험장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위조 신분증을 이용한 대리시험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2020년 182건이었던 부정행위 적발 건수가 2024년엔 414건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가장 큰 원인은 응시 기회가 지나치게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K문화의 세계적 열풍으로 전 세계 한국어 학습자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정작 이들을 평가하고 수용할 시스템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그 피해는 한국을 사랑하고 성실히 한국어를 공부해 온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졸업과 비자 연장에 차질을 겪는 경우가 많고, 정해진 급수를 받지 못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학생도 있다. 실력이 부족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시험장 접수 경쟁에서 밀려 ‘시험도 못 보고’ 방출되는 현실은 너무나 안타깝다.
TOPIK 주관 기관이 현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에서 민간으로 이양된다는 얘기도 들린다. 어쩌면 필요한 변화일 수도 있다. 더 현대적이고 더 많은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한때 TOPIK은 접근성 좋고 비용 부담이 적으며, 효율적인 데다 한 국가가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 만든 훌륭한 평가 시스템이었다. 세계적으로 이만큼 체계적으로 자국어 능력을 인증하고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한국어를 사랑하고 TOPIK과 함께 성장해 온 외국인으로서, 이 시스템이 본래의 가치를 되찾길 간절히 바란다.
TOPIK의 성공을 위해 애써 온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전 세계인의 열정에 걸맞은 체계로 다시 태어나, 더 많은 이가 한국을 알고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카를로스 고리토 브라질 출신 방송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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