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 지난 30년간 개발한 핵융합 기술의 핵심 소재를 180도 바꿔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연구소가 참여한 유럽 주도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상용화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최근 나오자 연구개발(R&D) 방향을 급하게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22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핵융합연은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고온 초전도체 자석 공동연구 협약을 체결했다. 자기부상열차와 양자컴퓨터, 초고효율 송전선 등 미래 첨단 기술 소재로 각광받는 고온 초전도체는 영하 20~190도 범위에서 작동한다. 문제는 핵융합연이 1995년 설립 후 영하 269도(절대온도 4K)에서 작동하는 저온 초전도체 연구만 해 왔다는 점이다. 초전도 자석의 성질이 달라지면 플라스마를 감싸는 토카막 내벽과 플라스마를 제어하고 가열하는 여러 초대형 코일, 블랭킷, 진공용기와 열차폐체, 냉각설비 등의 연쇄적인 설계 변경이 불가피하다.
핵융합 기술 커뮤니티에서도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한 전문가는 “30년간 막대한 국가 돈을 들여 농구를 가르쳤더니 갑자기 축구를 하겠다고 덤비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핵융합 발전은 원전 이상의 효율을 보이면서 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이 나오지 않아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터 시대 최적의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꼽힌다.
◇ITER, 구시대의 유물?
전 세계 핵융합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ITER 국제자문단은 지난달 말 이탈리아 공사 현장 답사에서 ITER 핵심 설비인 중성빔가열장치(NBTF)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ITER의 첫 플라스마 생성 목표 시점이 올해 말에서 2035년 이후로 갑자기 10년 이상 늦춰진 이유 중 하나다.
ITER은 니오븀과 주석, 티타늄으로 이뤄진 극저온 초전도체로 수소 플라스마를 3억도까지 가열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다.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만날 때 단위 시간당·부피당 상대속도와 충돌 단면적, 확률 등을 따져 수식으로 만들고 적분하면 반응률이 나오는데 이를 극대화하는 것이 핵융합 물리의 시작점이다. 이 밖에 투입 에너지보다 발생 에너지가 많아야 한다는 로슨 조건 등 무수한 계산과학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핵물리학부터 전기·전자, 기계, 화학, 재료, 건설 등 모든 공학 기술이 망라되는 거대과학이다. ITER 전체 체적은 40만㎥로 25층 아파트 3개를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하다. 토카막을 구성하는 자석은 30개 이상인데 1개당 무게는 400t, 높이는 4층 건물에 달한다. 크고 작은 공학적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 이유다.
◇각국은 소형 핵융합에 올인
ITER를 25분의 1 크기로 축소한 국내 핵융합 실험로 케이스타(KSTAR) 역시 성능이 한계에 달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핵융합연은 최근 케이스타와 ITER의 중간 크기인 ‘혁신형 핵융합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핵융합혁신연합 관계자는 이에 대해 “기술 혁신 없이 사이즈만 바꾸자는 것”이라며 “연구소는 핵융합을 실현할 엔지니어링 역량이 없다. 상용화를 위해선 민간 기업의 폭넓은 참여가 필요한데 핵융합연이 장악한 현재 구도에선 기업이 할 수 있는 게 아예 없다”고 지적했다. 핵융합혁신연합은 작년 말 현대건설 삼성물산 한국전력기술 등 관련 기업과 연구자들이 참여해 발족했다.
한국이 ITER에만 집착하는 사이 선진국 기업들은 ‘소형 핵융합’ 기술 상용화에 바짝 다가섰다. 상용화에 가장 근접한 기업으로는 미국의 커먼웰스퓨전시스템(CFS)이 꼽힌다. 미 스타트업 잽에너지는 작은 공간에서 고밀도 초고온 플라스마를 생성하는 기술인 ‘Z-핀치’를 쓴다.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지원하는 스타트업 헬리온에너지는 중수소와 헬륨3를 쓰는 소형 핵융합 발전소 폴라리스를 이르면 연내 가동할 예정이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헬리온에너지(소형 핵융합)와 오클로(초소형 원전) ‘투 트랙’으로 AI 연산에 필요한 전력을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윤건수 포스텍 첨단원자력공학부 교수는 “올트먼뿐 아니라 빌 게이츠와 제프 베이조스, 피터 틸 등 억만장자들이 핵융합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며 “소형 핵융합은 AI와 양자(퀀텀)기술 등 미래 산업뿐 아니라 우주·국방 분야의 게임 체인저”라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 핵융합 발전
태양의 원리를 모방한 미래 발전소. 중수소와 삼중수소 또는 중수소와 헬륨3가 플라스마 상태로 융합할 때 상대성 이론에 따라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