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빌런 김정은'을 대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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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칼럼] '빌런 김정은'을 대하는 법

“남조선은 정권이 곧 끝날 건데 급할 게 없다. 얻을 것만 얻으면 된다.” 김대중 정부 말기 남북 장관급 회담에 참여한 북측 관계자가 사석에서 속삭인 이 말은 아직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북한은 이 점을 대남 관계에서 마음껏 활용했다. 홍순영 당시 통일부 장관은 생전 북측 협상 태도에 대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빚쟁이가 빚을 독촉하듯 했다. 40년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협상 ABC는 고사하고 이런 안하무인, 기고만장은 처음 봤다.”

홍 장관은 2001년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6차 장관급 회담 때 상부 지시를 어기고 회담 결렬을 선언하고 돌아왔다가 두 달 뒤 경질됐다. 김정일이 남측 장관 목줄을 쥐고 있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 쏟아진 남북 협상에서 남측이 북측 특유의 기만·지연전술에 끌려다닌 예는 한둘이 아니다. 북한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기 일쑤였고, 남측은 하릴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을 시작으로 좌우 정부를 가리지 않고 의욕적인 대북 정책을 내놨지만, 모두 실패했다. 북한은 임기 5년 내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남측을 이용 대상으로 여길 뿐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 인사들은 진보정권이 이어졌으면 평화가 왔을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어불성설이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가동으로 달러가 북한에 들어가고 5억달러, 경의·동해선 철도·도로 건설 등 수없는 지원에도 태평양에 떨어진 대포동 미사일 발사, 1·2차 연평해전, 2차 북핵 위기, 1차 핵실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등이 일어난 것은 민주당 정부 때다.

이재명 정부가 포괄적 단계적 비핵화로 평화체제를 이루겠다는 공약을 냈다. 20년 전 자주파로 불리던 인사를 대북 핵심 라인에 재기용했다.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한다면 단기 업적에 연연해 핵 개발 고도화 시간만 벌어주는 우(愚)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북한의 핵무기 능력은 과거 민주당 정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됐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핵보유국을 선언한 북한은 고농축우라늄 시설을 늘리고 있고, 수십 기인 핵무기를 2030년 160기 확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지난 40년간 남측 좌우정권 가릴 것 없이 그들의 전략적 사이클대로 부단히 기술 축적을 해온 결과다. 핵을 가진 나라가 핵을 포기한 전례가 없고, 김정은도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그간의 핵 개발 비용과 노력을 계산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변변한 핵무기가 없던 20년 전 자주파의 실패한 북핵 해법을 원용해 실효성을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한은 단계적 동시 이행을 내세우며 영변 냉각탑과 풍계리 핵실험장 입구 폭파를 해놓고 쇼로 끝냈다. 게다가 러시아 푸틴은 북한에 핵기술 이전을 공언하는 등 시진핑과 함께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김정은으로선 급할 것 없는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0여 차례 러브레터에도 반응하지 않는 이유다. 급한 쪽인 트럼프가 동결 수준에서 업적으로 내세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른바 스몰딜인데, 이는 핵동결에 합의했다가 사기를 당한 제네바 합의의 재판(再版)으로 피해야 할 선택지다.

9·19 군사합의 복원, 대북전단 금지, 대북 확성기 중단 등 유화책들이 나오고 있다. 김대중평화재단은 남북 정상회담을 요구하고 있다. 낙관은 금물이다. 북한은 수틀릴 때마다 남북 공동선언·성명을 파기했고, 공짜 평양냉면도 한 번도 없었다. 김정은이 설령 협상에 나서더라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선의를 악의로 갚아온 ‘빌런 북한’을 다루려면 당근만으로는 안 된다. 먼저 다급한 모습을 보인다면 김정은은 역이용할 게 틀림없다. 군사합의 복원을 추진한다면 이를 먼저 깬 북한의 사과부터 요구하는 게 순서다. 남측에 불리한 합의 내용도 ‘등가성(等價性) 원칙’에 맞게 재조정해야 한다. 포괄적 단계적 비핵화 협상을 하더라도 이전에 단기 업적을 위해 눈 감아 준 단계별 철저한 검증은 필수다. 북한의 숱한 ‘먹튀’와 위장 평화쇼에 또 당하지 않기 위해 임기 내 성과에 집착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하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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