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경기 진단 '립스틱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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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6.16 17:41 수정2025.06.16 17:41 지면A31

[천자칼럼] 경기 진단 '립스틱 지수'

경기가 나빠지면 립스틱이 잘 팔린다는 얘기가 있다. 고가 소비는 줄이면서도 작은 사치로 기분을 전환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란다. 2001년 닷컴버블 붕괴 당시 이 같은 현상을 포착한 인물이 레너드 로더 에스티로더 명예회장이다. 그는 자사 제품 중 고급 스킨케어나 향수 등 고가품 매출은 감소하는데,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립스틱 매출은 증가하는 것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작은 사치품’에 대한 대체 소비 증가를 반영한 ‘립스틱 지수’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는 “경기가 나빠지면 여성들은 샤넬백을 사는 대신 립스틱 한 개로 기분을 전환한다”고 설명했다. 소비심리를 반영하는 이 지표는 이후 불황기를 가늠하는 잣대로 쓰이고 있다. 로더 회장이 지난 15일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립스틱 지수처럼 소비 행태를 통해 경기를 읽으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 테일러는 1926년 치마 길이와 경기 변동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헴라인(치마 끝단) 지수’를 발표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스타킹을 살 여유가 없어 치마가 길어진다는 것이다. 실제 1930년대 대공황과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긴 치마가 유행했다. 미국 IBM은 2011년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면 외형적 자신감을 높이려는 욕구가 커져 여성 구두 굽이 높아진다는 ‘하이힐 지수’를 내놨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굽 높이가 최고 18㎝까지 올라갔다는 분석도 제시했다. 이외에 남성 셔츠 컬러, 주류·라면 판매, 보험 해약률, 중고차 가격 등이 경기 바로미터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기존 이론과 다른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불황기일수록 우울한 기분을 털어내려는 소비가 늘면서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거나, 속옷에 오히려 더 큰 지출을 하는 보상 소비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비 행태의 미세한 변화를 바탕으로 경기 흐름을 진단하려는 행동경제학과 소비문화 연구는 지금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경기는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정부, 제품 출시 전략을 세우는 기업, 재테크를 고민하는 개인 모두에게 중요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서욱진 논설위원 ventu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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