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흔들리는 '보수의 심장'>, <유세 격전지 된 '보수 심장'>, <대선의 격전지 된 '보수의 심장'>. 대선 공식 선거운동 이틀째인 지난 13일 이재명·김문수·이준석 등 대선 후보들이 모두 대구·경북(TK) 지역에서 유세를 벌였고 그다음 날 조간신문이 이를 전하는 기사 제목에 쓴 일부 표현들이다. 기사 내용에도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며 국민의힘 텃밭이나 다름없는 TK…"와 같은 문구가 나온다. 대선 후보들이 일제히 TK 공략에 나선 상황을 전하면서 상투적인 용어들이 또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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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연합뉴스) 윤관식 기자 = 15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한 유권자가 제21대 대통령 선거 벽보를 살펴보고 있다. 2025.5.15
TK 지역이 대선 격전지가 된 것 자체가 이례적이긴 하다. 2022년 대선만 해도 이재명 후보의 대구 득표율은 21.6%, 경북은 23.8%였다. 반면 윤석열 후보의 득표율은 대구 75.1%, 경북 72.8%였다. 이 후보는 TK 지역에서 시도별 득표율이 가장 낮았고, 윤 후보는 이 지역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에서 주요 3당이 TK 지역에서 기세 선점에 나선 것은 이 지역에 대한 보수 정당의 장악력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의미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특히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의 탄핵으로 치러지는 선거인 만큼 TK 민심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정치권은 선거철만 되면 '보수의 심장'이니 '보수의 아성'이니 하는 용어들로 TK 지역을 추앙하면서 표를 호소했다. 국민의힘 계열 정당은 으레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의 배타적 의리를 들먹이며 압도적 지지를 구했다. 민주당 계열에선 조그마한 끈이라고 찾아보려는 듯 대구가 과거 '혁명의 도시'였으니 '조선의 모스크바'였으니 하는 데 식상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늘 '언제 그랬냐'는 식이었다. 대구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30년 넘게 전국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공천만 하면 당선은 '떼놓은 당상'인 상황만 계속됐고 언젠가부터는 대구를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 가운데 전국적인 인물을 찾기 어려워졌다. '경상도 보수 정권'은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다.
결국 정명(正名)의 문제다. 대구가 여전히 '보수의 심장'이 맞는가. 보수 정치를 대표할만한 인물이 꾸준히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단지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일 뿐이다. 그렇다고 유권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도 아니다. 대선 투표권을 가진 TK 주민은 426만여명이다. 전체의 9.6%에 불과하다. 호남(전남북·광주)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우리 정치사에서 전국 선거의 승패는 수도권과 중부권 표심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구에서 초중고를 나온 후 쭉 서울에서 생활했다. 말하자면 TK 출신이지만 해당 지역의 집단적인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TK 지역은 척박한 토지 때문에 경제력이 약해 학문을 통해 벼슬길에 나섰던 전통이 있다. 이 때문에 유교 전통이 강하고 예의와 염치를 중시하는 한편 강한 자존심 때문에 고집이 세고 상대적으로 배타적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 영향인지 의리를 중시하고 한 번 '의리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면 주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풍토가 강한 편이라고 하는데 이런 평가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의리를 중히 여기는 것은 한국인의 일반적인 정서 아닌가.
지금 대구를 대표하는 정서라고 딱히 내세울 게 있는가 싶다.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여전히 '보수의 심장'이라고 부를 뿐이다. 몇 년 전 언론계에서 퇴직한 고향 선배는 지난달 자신의 SNS에 "대구 민심 기사 그만 씁시다"라고 썼다. 그는 "그 지역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생각, 실험 등이 미래지향적이거나 다른 지역에 통찰을 준다면 그 내용을 자세히 알아내고 전달하는 게 필요하지만 지금 대구는 그렇지 않다"면서 "이런 부류의 기사는 대구 경북을 오히려 점점 더 고립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글에는 '대구를 더 이상 조롱거리로 만들지 말자'는 댓글도 달렸다.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씨가 1971년 7대 대선 당시 경북 지방 유세에서 "경상도가 안 밀어주면 누가 밀어주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경상도 정권'이라는 말을 처음 꺼냈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을까. 경상도 정권에 맞서 '전라도 푸대접'론과 '충청도 핫바지'론이 등장했고 지역 정서에 호소해 지역표를 싹쓸이하는 폐해가 우리 정치의 고질병이 됐다. 5·16 이전만 해도 지역별로 정당 지지도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일은 없었다. 지역 정서를 과도하게 부각하고 편을 갈라 표를 얻는 구태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이제는 그만 '보수의 심장'을 놓아주자. TK 출신의 하소연이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5월16일 06시10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