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은 부츠처럼 발목을 높이 잡아주는 스케이트를 신어야 부상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 선수들은 마치 초보자용처럼 발목이 낮은, 한눈에도 저렴해 보이는 스케이트를 신고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그걸 신고 렴대옥-한금철 조는 은메달까지 받았으니, 각각 26세와 25세가 되도록 저들이 흘렸을 피눈물은 가늠하기 어렵다.
이번 겨울아시안게임에 북한은 단 3명의 선수만을 보냈다. 하얼빈은 북한에서 열차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치러지는 국제대회라고 할 수 있음에도 3명밖에 보내지 못했다는 것은 북한의 겨울 스포츠는 피겨스케이팅을 빼곤 사실상 전멸 상태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한때 스피드스케이팅이 매우 강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메달을 차지한 선수가 바로 북한 한필화 선수다. 그는 1964 인스브루크 겨울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종목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이는 아시아 여성 선수 최초의 겨울올림픽 메달이기도 했다.그런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지금 북한 스피드스케이팅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다. 한국은 쇼트트랙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있고,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세계 기록을 세운 이상화나 올림픽 금메달을 받은 모태범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계속 배출한다. 같은 민족인 데다 지옥 훈련이라면 세계 최고 수준일 북한이니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우수한 선수들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설과 장비 문제다. 북한에도 당연히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이 있지만 훈련장이 없어 늦가을에 돼서야 함경남도 부전에 가서 야외 훈련을 시작한다. 장진호 바로 옆인 부전은 춥기로 악명 높다.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 밖에서 훈련을 하다 보니 동상을 입거나 방광염에 걸리고, 발톱이 빠지는 일이 잦다.
선수들은 실력에 따라 스케이트를 차등 지급받는데, 4등급은 북한제 스케이트를 지급한다. 이게 스케이트냐 할 정도로 한심한 것이다. 3등급으로 인정되면 러시아제 스케이트를, 2등급으로 인정되면 독일제 스케이트를 준다. 국가대표급인 1등급으로 인정받은 선수 한두 명에게는 일본제 스케이트를 지급한다. 그런데 이 외제 스케이트도 새것이 아니다. 선배들이 타고 또 타던 것이라 스케이트 날이 쉽게 무뎌져서 전문적으로 날을 갈아주는 사람을 매 조에 한 명씩 두고 있다. 선수보다 스케이트가 더 귀한 상황이니 스키니 하키니 하는 종목은 어림도 없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이런 북한에서 종목을 막론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나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하지만 이런 가난하고 슬픈 이야기들은 두꺼운 얼음장 아래에 깊숙이 숨겨져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북한의 모습엔 허세만 가득하다.지난달 김정은은 전략핵잠수함(SSBN)인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 건조 현장을 공개했다. SSBN은 세계 6개국밖에 보유하지 못한 수십억 달러짜리 무기이다. 유지비도 너무 비싸서 공짜로 줘도 운용하지 못할 나라들이 태반이다. 지난달 말에는 조기경보통제기도 공개했다. 북한과 동일하게 Il-76 수송기 기반인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는 업그레이드 성능에 따라 가격이 4억∼6억 달러에 이른다.
핵무기에, 미국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정찰위성 등등 북한이 최근 공개하는 무기들은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것이다.
무기뿐만이 아니다. 평양에는 화려한 거리들이 매년 건설되고, 원산엔 제주도 전체 객실 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객실 2만 개짜리 거대한 해안관광단지가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것도 분명히 북한의 현실이다. 김정은은 그걸 봐달라고 딸과 함께 열심히 돌아친다. 그의 눈과 귀는 늘 무기나 건물에 머물러 있을 뿐, 사람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러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장에서 죽어가는 수천 북한군 병사의 울부짖음이나 최전방에서 지뢰를 매몰하다 수시로 사고로 죽어가는 군인들의 비명이 들릴 리가 만무한 것이다.
목숨이 하찮은 곳에선 꿈도 하찮다. 너덜너덜해진 일본제 스케이트를 받는 것이 북한 빙상 선수들의 꿈이다. 그 꿈을 이뤄도 렴대옥처럼 외국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의 스케이트를 부럽게 바라볼 기회는 극소수에게만 돌아갈 뿐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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