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베트남 포뮬러와 애치슨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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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베트남 전쟁은 패배를 모르던 세계 최강 미군에게 상처와 상실감을 남겼다. 미국인들에겐 '잊힌 전쟁'으로 불릴 만큼 잊고 싶은 기억이며 소설과 영화에서도 흑역사로 묘사된다. 미국의 적극적 개입 정책도 베트남전 실패를 계기로 전환점을 맞는다. 특히 동맹국들이 안보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은 주로 아시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미군의 베트남 철수, 미·중 수교, 중국의 부상 등 20세기 아시아 권력 지도를 새로 쓴 일련의 사건들이 닉슨 독트린을 계기로 일어났다.

당시 기조 변화를 헨리 키신저가 주도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 장기화와 여론 악화로 이전부터 이미 미 외교가와 정가에선 '베트남 포뮬러'란 말이 회자하고 있었다. 공식 용어는 아니었으나 젊은이들의 목숨과 천문학적 예산을 기약 없이 투입하는 비용과 남베트남의 수호 가치를 비교할 때 철군이 답이라는 공식(formula)이었다. 이는 닉슨 독트린의 토대를 놓았고 여전히 유효하다. 개입과 불개입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놓였을 때 불개입을 택할 근거로 남은 것이다.

이미지 확대 베트남 다낭 입항하는 미국 항공모함 루스벨트

베트남 다낭 입항하는 미국 항공모함 루스벨트

(다낭 EPA=연합뉴스) 미국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5일 베트남 다낭에 입항하고 있다. 미국 항공모함이 베트남에 기항하는 것은 베트남전 종전 이후 두 번째다. 2020.3.5

15년간 이어진 베트남전이 남베트남 패망으로 끝나고 베트남 공식이란 신조어까지 낳은 것은 남베트남의 자멸 탓이 컸다. 남베트남 단독으로 싸워도 지기 어려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남쪽은 병력, 무기, 경제력 등 모든 외형 전력에서 북쪽보다 한참 우월했다. 심지어 미군은 1973년 파리협정에 따라 철수할 때 무기를 모두 놔두고 떠났고 남베트남의 공군력은 세계 4위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2년여만에 남베트남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상식으론 설명 안 되는 이 결과는 당시 속사정을 들춰보면 이해가 간다. 남베트남 정부는 부패가 만연했고 군은 정신 무장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장군들은 나약했다. 미군이 놔두고 간 무기를 적군에 팔 정도였다. 간첩과 반란군이 활발히 활동했고 소요와 내란도 잦았다. 우리가 아는 '베트콩'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아니라 남베트남 내부의 반란군이었다. 북베트남의 호찌민 점령 이후엔 남베트남의 정부, 군대, 정보기관, 의회, 사법부 요직에 간첩들이 있었던 사실도 드러났다. 베트남 포뮬러는 결국 동맹국이라도 국민 의식과 공권력 저하로 자멸할 경우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남았다.

이전에도 미국의 국제관계 정책은 주기적으로 개입과 불개입을 오갔다. 먼로 독트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는 불개입 원칙이 주를 이뤘다. 1950년 1월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선언한 극동 방위선인 '애치슨 라인'도 개입 최소화의 산물이다. 당시 신생국이던 우리는 애치슨 라인 안에 포함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지만 결국 극동 방위선은 일본에서 끊겼다. 불과 몇 달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잘 안다.

주한미군 감축설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이후 동맹국들에 미군 방위비 인상을 요구하는 행보와 무관치 않다. 1기 트럼프 정부에서 봤듯 방위비 협상 카드로 감축을 들고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주한미군 병력 유지 문제는 세계 미군의 전략적 재배치와도 맞물렸다. 중국 견제가 화두인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서 일본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필수 주둔지이고, 인도와 베트남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한국이 여전히 대군을 주둔할 필요가 있는 지역인지를 놓고 미국은 과거에도 그랬듯 계속 고민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한미군은 전면전 시 자동 개입을 뜻하는 인계철선(tripwire) 역할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애치슨 라인과 베트남 포뮬러는 이름만 바꿔 반복될 역사일 수 있다.

이미지 확대 6·25 전쟁 때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6·25 전쟁 때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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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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