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전쟁의 경제적 파급효과
《1853년 11월 23일, 러시아 해군 중장 파벨 나히모프는 전열선 세 척, 프리깃 한 척, 증기선 한 척과 함께 흑해의 항구도시 시노프의 외해에 자리 잡았다.당시 시노프에는 튀르키예 해군의 프리깃 일곱 척, 코르벳 세 척, 증기선 두 척이 정박해 있었다.
튀르키예는 약 한 달 전인 10월 1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1839년 16세의 나이로 튀르키예의 술탄이 된 압뒬메지트 1세는 전적으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압뒬메지트는 자신의 아버지인 마흐무트 2세가 시작한 개혁을 지속해 나갔다.
가령 세금을 공평하게 매기는 한편 차별 없는 징병제를 수립하고 새로운 화폐인 오스만 리라를 제정했다.》
압뒬메지트는 1845년에 시작된 아일랜드 대기근 때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일랜드인들을 살리라며 1만 파운드를 기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시기 평범한 영국인이 주급으로 받는 돈의 약 2만500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시 영국 여왕 빅토리아와 미국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각각 2000파운드와 10파운드를 내놓았다. 영국은 여왕의 체면이 깎인다는 이유로 1만 파운드 중 1000파운드만 받았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나히모프 중장은 원군을 요청했다. 11월 27일 원군을 구하러 갔던 프리깃이 전열선 세 척, 프리깃 한 척, 증기선 두 척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사흘 뒤 나히모프는 휘하의 열한 척에 시노프 항구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했다.
겉보기엔 튀르키예 함대가 기댈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시노프의 해안 포대가 전투에 호응할 수 있었다. 또 이스탄불에는 마흐무디예 같은 전열선이 있었다. 128문의 포를 장비한 마흐무디예는 진수된 1828년부터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군함이었다.
중요한 건 외견이 아니라 내실이었다. 러시아 군함의 포는 앙리조제프 펙상이 만든 거였다. 펙상은 프랑스의 공병 및 포병 사관학교로 세워진 에콜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프랑스 해군 장교였다. 펙상 포의 포탄은 발사된 지 일정한 시간 후에 터졌다. 이는 포탄이 나무로 만든 적선의 안쪽으로 뚫고 들어간 뒤에 폭발한다는 의미였다. 반면 튀르키예 군함은 볼링공이나 다름없는 기존의 공 모양 포탄을 쐈다.
시노프 해전의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열두 척의 튀르키예 함대 가운데 두 척이 침몰됐고 아홉 척이 좌초됐다. 증기선 한 척만 나포를 피해 겨우 이스탄불로 도망쳤다. 반면 러시아 함대는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튀르키예의 전황이 어둡자 1854년 3월 27일 과대망상에 빠져 있던 샤를 루이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치어리더로만 남고 싶었던 영국도 다음 날 마지못해 참전했다. 물론 영국은 그해 8월부터 압뒬메지트에게 거액의 돈을 차례로 빌려줘 전쟁을 치를 무기를 사게 했다.
크림 전쟁이 시작되자 러시아의 해상 무역이 중단됐다.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봉쇄 때문이었다. 크림 전쟁 직전까지 러시아는 주로 곡물을 수출하고 소비재를 수입했다. 이는 러시아가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는 의미였다.러시아에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뿌리인 영국의 승전을 경계했다. 대외적으로 미국 정부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러시아를 돕겠다는 물밑의 움직임이 있었다. 가령 수십 명 이상의 미국인 외과의가 러시아군에 자원 입대했고 미국 육군은 러시아군에 참관인 자격으로 장교를 파견했다.
콜트는 후대의 무기상에게 교본 같은 인물이었다. 일례로 1854년 콜트는 술탄의 이름이 새겨진 금박 권총을 압뒬메지트 1세에게 선물했다. 이어 흡족해 하는 압뒬메지트에게 러시아가 자기에게 권총을 대량으로 주문했다고 귀띔했다. 불안해진 압뒬메지트는 5000정의 콜트 권총을 주문했다. 콜트는 같은 수법으로 러시아로부터 계약을 따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고, 콜트 대령이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다’가 콜트의 마케팅 슬로건이었다.
크림 전쟁의 영향은 또 있었다. 미국의 증권시장이었다. 특히 곡물과 관련된 주가가 올랐다. 영국 때문이다. 전쟁 전에는 러시아 수출의 37%가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영국의 봉쇄로 러시아의 해상 무역이 중단되면서 영국은 곡물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야 했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투자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산된 곡물을 수출하려면 일단 항구까지 실어 날라야 했는데, 그러려면 기존 철도의 가동률이 올라가고 운임 수입이 증가하기 마련이었다. 즉, 철도 회사가 곡물 회사 이상으로 유망해 보였다.
게다가 리틀은 1837년 미국에 금융 공황이 닥쳤을 때 공매도로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 모았다. 미국의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한 리틀의 별명은 바로 ‘거래소의 나폴레옹’, 그리고 ‘월가의 위대한 곰’이었다. ‘곰’이란 공매도로 돈을 불리는 증권 거래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855년까지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피해가 누적된 끝에 1856년 3월 돌연 크림 전쟁이 끝났다. 패배한 러시아는 약간의 영토를 잃었지만 승자가 얻은 건 미미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누리던 곡물 특수가 갑자기 사라졌다.
1857년 8월 미국의 가장 오래된 곡물 회사인 울프가 파산했다. 같은 달 오하이오생명보험신탁은 지급 불능에 빠졌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껍데기 철도 회사들에 오하이오생명보험신탁이 대출을 많이 해 준 탓이었다. 곧이어 일리노이센트럴, 이리 등의 철도 회사들이 도미노처럼 파산했다. 바로 1857년 금융 공황이다.
1857년 금융 공황이 이전보다 위기의 세기와 속도가 컸던 것은 바로 새뮤얼 모스가 1840년대에 설치한 전신 때문이었다. 미국 국내로 끝나지 않고 영국으로도 옮겨 붙은 1857년 금융 공황은 최초의 글로벌 금융 위기이기도 했다. 미국이 금융 위기를 빠져나온 건 1861년 남북 전쟁이 개시된 뒤였다.
남북 전쟁 개전 직후에 죽은 압뒬메지트가 남긴 빚은 결국 나중에 튀르키예가 영국에 더 많은 이권을 넘겨주는 지렛대가 되었다. 샤를 루이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세당에서 몸소 지휘한 12만 명과 함께 적군 포로가 돼 프랑스의 망신이 됐다. 철도 회사에 막대한 롱 포지션을 쌓았던 리틀은 1857년 금융 공황 때 전 재산을 잃고 1865년 남북 전쟁 종전 직전에 무일푼으로 죽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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