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세스닉 미시간대 항공우주공학과 학과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학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 역사와 전통을 꼽았다. 그는 "미시간대 항공우주공학과는 올해 창립 111주년을 맞이했다"며 "디트로이트 주변으로 형성된 미국 엔지니어 생태계의 뿌리가 미시간대에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미시간대 항공우주공학과는 1904년 미국 최초로 탄생한 우주 학과다. MIT 항공우주공학과는 1905년 문을 열었다. 이 학과는 역사에 걸맞게 가장 강력한 '우주 맨파워'를 자랑한다. 인맥과 학맥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미시간대 출신이 없으면 '우주의 시간'이 멈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시간대 출신 없으면 NASA의 시간 멈춘다"
세스닉 학과장은 "NASA를 비롯해 정부 기관 등 곳곳에 미시간대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어 국제 협력이 필수인 우주항공 분야에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고 했다. 미시간대는 총 26명의 노벨상 수상자 배출했고, 7명의 NASA 우주 비행사, 25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한국에서도 고위직 공무원 및 각 분야 대표자들이 미시간대 출신들이 즐비하다. 이 대학 출신인 윤영빈 우주항공청장은 "미시간대 항공우주공학과는 우주 탐사의 핵심인 공기 역학과 추진 분야의 교수진, 커리큘럼이 뛰어나다"며 "최고 인재를 선발하는 NASA가 미시간대 출신을 선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미시간대 항공우주공학과는 국책사업을 함께 하며 성장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1957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이 치열해지자 미국 정부는 로켓, 추진체에 강점을 갖고 있던 미시간대에 과제를 맡겼다. 미시간대는 1965년 발사된 유인우주선 '제미니 4호'의 우주인 중 2명인 제임스 맥디빗과 에드워드 화이트, 네번째달 착륙 유인 우주선이었던 '아폴로 15호'의 우주인인 데이비드 스콧, 제임스 어윈, 알프레드 워든과 같은 걸출한 우주인들이 배출했다.
미시간대는 달에도 동문회를 설립한 최초의 대학교라는 말을 할 정도로 우주 공학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미시간대 학생회관 입구에 새겨져 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나는 동부 미시간대(하버드)를 졸업했다"는 문구는 치열한 우주경쟁 속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미시간대 공대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보여준다.
우주항공 최고 아웃풋 켈리 존슨 배출
미시간대는 다양성 정책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SW)를 배출했다. '우주항공 추진체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설적인 엔지니어 켈리 존슨과 1969년 아폴로 11호의 비행 소프트웨어(SW) 설계 책임을 맡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첫 여성 과학자인 마거릿 해밀턴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각각 이민자 출신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연구개발(R&D) 인력난을 겪는 한국도 미시간대처럼 동남아 등 해외 우수 인재에 문을 더욱 개방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주항공 역사상 최고의 엔지니어로 평가받는 존슨은 미시간대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인재다. 스웨덴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미시간주 이쉬페밍의 외딴 마을에서 자란 존슨은 집이 가난했다. 하지만 13세에 첫 비행기 설계로 두각을 보였고, 그런 존슨에게 이민자 우대 정책을 펼친 미시간대는 우주항공 엔지니어로 성장하기에 최적의 대학이었다. 미시간대 공대에 입학한 존슨은 록히드마틴의 엘렉트라 여객기 풍동 실험을 하던 중 비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고, 이를 보고하면서 대학 졸업 후 록히드마틴에 취직했다.
그러던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존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업계에서 촉망받던 존슨에게 미 국방부는 단 6개월 내 신형 제트기를 만들어보라고 의뢰했다. 존슨에게 배정된 엔지니어는 단 50명에 불과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존슨은 캘리포니아 버뱅크시의 한 대형 서커스 천막을 임대해 작업실 설치하고 설계를 진두지휘했다. 작업실 인근은 악취가 진동했다. 엔지니어들은 작업실을 냄새가 난다고 해서 '스컹크웍스'라고 비꼬았다. 록히드마틴이 자랑하는 핵심 연구개발(R&D) 조직 스컹크웍스의 모태가 바로 존슨의 작업실이었다.
존슨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직접 정비사처럼 바닥을 기고 기름과 흙을 온몸에 묻혀가면서 일했다. 그 결과 마감 기한 보다 한 달 이상 빠른 143일 만에 미국 최초의 작전용 제트기인 'P-80슈팅스타'를 만들었다. 2차 대전 직후부터 양산된 이 제트기는 9000대 이상 팔려 최고의 히트 제품으로 등극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400마일 돌파 비행기 'P-38 라이트닝', 최초의 마하 2 돌파 전투기인 'F-104 스타파이터' 등 역사상 가장 성능 좋은 것으로 평가받는 항공기들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항공기는 첩보기 'U2'와 'SR71'을 비롯해 전폭기 'F104', 'F117A' 등 총 40대 넘은 항공기를 만들었다. 스컹크웍스에서 만든 U2와 SR71은 냉전시대에 소련을 감시하는 가장 중요한 첩보도구였다.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U2기가 소련 영공을 비행할 때마다 일일이 재가를 받으라고 했을 정도다. 1946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U2였다.
NASA 금녀의 벽 깬 마거릿 해밀턴
하드웨어에 존슨이 있다면 미시간대를 빛낸 SW 엔지니어로는 1969년 아폴로 11호의 SW 설계 책임을 맡은 마거릿 해밀턴이 있다. 그녀 역시 미시간대의 소수계 우대 정책으로 학위를 딴 우주항공 SW 엔지니어다. 해밀턴은 24세였던 1962년 NASA에 입사했다. 하지만 1960년대엔 백인 여성 과학자도 NASA에서 차별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폴로 프로젝트 참여 배경에 대해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남성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하드웨어 엔지니어였다"며 "나는 NASA가 고용한 첫 SW 프로그래머이자 첫 여성"이라고 회고했다.
해밀턴은 아폴로를 비롯해 NASA의 우주실험실인 스카이랩 SW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NASA는 "마거릿이 개발한 아폴로 제어 시스템은 오류가 전혀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고 설명했다. 해밀턴은 아폴로 계획을 위한 기내 비행 SW 개발을 지휘한 공로로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인 자유훈장을 받았다.
앤아버=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