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진의 의료와 사회] 표 안 되는 희소질환 공약, 그래도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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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진의 의료와 사회] 표 안 되는 희소질환 공약, 그래도 필요한 이유

한국은 전쟁 폐허 속에서 반세기 만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위권 소득 수준과 의료 인프라를 갖춘 나라가 됐다.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성공 사례다. 그러나 좋은 나라란 단지 경제지표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품격과 도덕적 성숙이 결정된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개인이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capability)을 갖도록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본질적 임무”라고 했다. 존 롤스 역시 “합리적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가장 불리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혜택이 돌아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강조했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국가의 발전 수준을 평가할 때, 단순히 국내총생산(GDP)만 아니라 보건·교육·삶의 질 지표와 더불어 소외계층의 역량 강화를 핵심으로 본다. 결국 좋은 나라란 다수의 평균이 아니라 소수의 삶을 어디까지 돌보느냐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현실 정치는 이런 가치와는 거리가 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발표되는 의료 공약을 보면 응급의료 체계 개선,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필수의료 확충 등 익숙한 과제만 반복했다. 대부분 다수 유권자의 표심을 의식한 설계다. 그러나 희소질환자, 중증장애인, 저소득 만성질환자 같은 의료 사각지대의 존재들은 좀처럼 공약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정치적 영향력과 유권자 수가 적다는 이유에서다.

2023년 기준 통계에 따르면 희소질환 산정특례 등록 환자는 약 37만 명이다. 그러나 미진단 상태의 환자, 산정특례 기준에 들지 못한 환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소질환자는 훨씬 많다. 사실 정확한 통계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희소질환은 치료제가 없고 증상 완화와 가족 돌봄에 의존해 살아간다. 치료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가이거나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가계가 파탄에 이르기도 한다.

이번 대선에서는 평균 국민을 위한 공약이 아니라, 의료제도의 가장자리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조적인 약속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으로 ‘국립희귀질환센터’ 설립을 제안한다. 이 센터를 거점으로 조기 진단부터 임상시험 연계, 치료제 개발, 환자 등록관리, 사회복지 연계까지 통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의료기관이 아니라 의료-복지 통합 시스템의 거점이자 국가 책임의 상징기관이어야 한다. 희소질환 진료 경험이 풍부한 여러 대학병원 교수가 겸직하며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일본은 1986년 국립정신·신경의료연구센터(NCNP)를 확대 개편해 희소·난치질환의 진단 및 치료부터 연구개발까지 통합 추진하고 있다. 유럽 각국은 유전자 치료와 희소질환 의약품 개발을 공공투자와 법적 보호를 통해 뒷받침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민간과 가족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

대선은 단지 정권을 고르는 절차가 아니라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묻는 기회다. 지도자는 다수의 소리를 좇는 사람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고통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의료 공약이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성숙했는지를 드러내는 품격 선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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