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 개편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15일 국정기획위원회는 “연구 생태계 복원을 위해 출연연 인건비를 정부 예산으로 100% 운영하는 안을 포함해 다양한 안을 논의 중”이라며 “연구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혁신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을 싹 뜯어고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국정기획위 경제 2분과를 맡은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와 관련해 “아직 결정된 것은 없지만 주요 과제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PBS는 출연연이 정부에서 받는 출연금 외에 국가 R&D 프로젝트를 수주해 연구비와 연구원 인건비를 충당하는 제도다. 과학계는 PBS로 연구자들이 하향식 연구 과제에 매달리는 사례가 많아 도전적 연구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과학기술연구회,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 출연연은 물론 KAIST,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등 주요 과학기술원과 정책 지원 기관까지 포함한 범부처 차원의 대대적인 구조 개편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은 실패 없는 과제에 연구력을 쏟다 보니 R&D 성공률이 90%대에 이르는 기형적 문화가 고착화했다. 이에 비해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발주한 프로젝트의 지난 10년간 R&D 평균 성공률은 17.8%에 불과하다.
실패 확률 높은 연구 기피하는 韓…中은 전력 다하면 책임 안 물어
'되는 연구'에만 목매는 과학자들…'실패 데이터' 활용하는 주요국
‘99.5%.’
2016년 김성태 당시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서 받아 공개한 자료에 적힌 수치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2015년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과제 2781개 중 실패로 판정된 연구과제가 단 13개(0.5%)에 불과했다는 것이 골자였다. 과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출연연별 연구 실패 세부내역은 눈을 의심케 할 정도다. 2014년만 해도 한국철도기술연구원 1건, 한국생산기술연구원 2건, 2015년 한국한의학연구원 1건, 한국생산기술연구원 3건, 한국에너지연구원 6건에 불과했다. 더욱 놀라운 건 2013년에는 성공률 100%였다는 점이다. 이 같은 연구과제 성공률은 한국 연구개발(R&D)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연구자들이 실패를 기피해 단기 성과에만 급급하고 도전보다 ‘되는’ 연구에만 매몰돼 나타난 기현상이다. 이후 정부에선 창의적 연구환경을 조성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R&D 성공률은 90% 안팎일 것이라고 과학계에선 입을 모은다.
◇중국, R&D 성공·실패 개념 없어
99.5%라는 수치는 해외와 비교하면 더욱 비정상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기관인 미 국립보건원(NIH)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시행한 ‘중소기업혁신연구 및 중소기업기술이전(SBIR·STTR)’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지난 10년 중 R&D 성공률이 20%를 넘은 해는 두 번뿐이다. 연도별로는 2015년 17.9%, 2016년 15.3%, 2017년 19.2%, 2018년 21.6%, 2019년 21.9%, 2020년 16.4%, 2021년 14.8%, 2022년 18.5%, 2023년 19.0%, 지난해 13.2%다.
평균 성공률은 약 17.8%로 한국의 90%대 성공률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NIH는 15~20%의 낮은 성공률을 유지하면서 실패 기반 혁신, 고위험 연구, 기술화에 집중하는 시스템을 조성했다. 실패 가능성이 높지만 성공 시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오는 연구 풍토를 안착시킨 NIH가 내놓은 최근의 결과물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당시 백신 개발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mRNA 백신이 대표적이다.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차기 회장으로 선출된 윤용규 플로리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R&D 과제를 선정하고 관리하는 백악관 직속 미 국립과학재단(NSF)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은 연구제안서에 정량적 목표를 제시하지 않는다”며 “미국에선 정부 과제에 대해 성공·실패를 평가하지 않고 연구의 성실·부실 여부를 철저히 따진다”고 말했다. 연구를 부실하게 한 연구자는 다음 연구제안서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는 식이다.
윤 교수는 “NSF나 NIH 같은 기관이 연구 결과를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만들어주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에 뛰어들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성과가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며 “성과 달성을 조건으로 달지 않고 연구비를 주는 ‘그랜트’ 개념이 자리잡은 것도 연구자들의 자발적 연구를 유도하고 있다”고 짚었다.
자율주행 기술 역시 이 같은 배경에서 탄생했다. 미 국방부 연구조직인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약 20년 전 개최한 무인자동차 경주대회가 자율주행의 시초다. 중국은 아예 R&D 분야에선 성공, 실패 개념이 없다. 될 때까지 투자하고 실패를 용인한다. 그마저 모든 실패 과정을 데이터로 남겨 후속 과제에 활용한다. 중국 중앙·지방정부의 첨단 기술·산업 관련 정책 발표에는 ‘룽춰지즈(容錯机制)’ ‘진즈몐쩌(盡職免責)’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룽춰지즈는 실패나 오류를 허용하고 포용하는 시스템을 가리키고 진즈몐쩌는 의무를 다했다면 실패하거나 손실이 나도 책임을 면제한다는 뜻이다. 네덜란드국립항공연구원(NLR) 책임연구원인 황중선 네덜란드한인과학기술자협회장은 “세계 최대 연구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의 연구 성공률도 20% 내외”라며 “네덜란드가 기초과학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실패해도 개인이 파산하거나 도태되지 않고 다음 연구로 이어질 수 있게 지원하는 실패 허용 시스템이 잘 마련돼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단기 성과보다 장기적인 효율성을 중시하는 R&D 문화와 스핀오프 창업, 선행 과제와 연계된 후속 과제 발굴도 네덜란드의 강점이라는 설명이다. 네덜란드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기업 ASML은 성공 확률이 제로에 수렴해 다들 외면한 EUV 기술을 꾸준히 밀어붙인 끝에 탄생했다. 네덜란드가 보유한 세계 1위 페인트 회사 악조노벨 역시 성공 가능성이 낮았지만 지속적으로 R&D에 투자한 결과 최초의 친환경 페인트 ‘듀럭스’를 개발했다. 기초과학 강국인 일본은 연구기관별로 상이한 성공률을 보이지만 최고 국가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RIKEN)와 일본의료연구개발기구(AMED)의 R&D 평균 성공률은 10~30%대다.
◇PBS 제도와 후진 연구 행정도 손봐야
출연연의 장기 프로젝트와 도전 연구를 막는 주범으로 꼽히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도 기형적인 R&D 성공률과 연관이 깊다. PBS는 출연연이 정부로부터 받는 출연금 외에 국가 R&D 프로젝트를 수주해 연구비와 연구원 인건비를 충당하는 제도다. 예산을 따려고 단기 성과에 치중하느라 장기·혁신·도전적 연구에 몰입하기 힘들다는 연구자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실패가 곧 퇴출인 지금의 PBS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을 포함해 이종호, 최기영, 임혜숙, 유영민 등 전임 장관들도 이 점에 공감하며 PBS 제도를 개편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PBS 제도 개편은 여전히 해묵은 숙제로 남아 있다. 현재 국정기획위원회 경제 2분과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PBS 제도 개편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구행정 전문성 강화도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다. 국내 연구행정·지원 인력의 규모·전문성이 선진국 대비 부족해 연구자에게 각종 행정적 부담이 전가된다는 지적이다. 국내 R&D 성공률이 90%를 웃도는 건 제도 자체가 그렇게 설계돼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과학계 한 석학은 “연구자에게 사전 목표를 써내라고 하는데 100%가 안 되면 연구를 지속할 수 없는 구조가 문제”라며 “목표 수치, 논문, 특허 개수, 사업화 성과 등 단기적 결과만으로 평가하고 효율성을 논하는 후진국형 평가 기준을 버리고 NIH, 중국처럼 실패를 허용하는 구조로 과감히 전환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