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성민]선행 학습과 숏폼, 우리 아이 뇌는 안전할까

1 month ago 5

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3년 전 동네 도서관에서 ‘아빠와 그림책 읽기’ 강좌를 들었다.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데 서툰 아빠를 위한 수업이었다. “그림책은 그림을 읽는 것이다. 아이가 그림과 교감하며 상상할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 참가한 아빠들은 강사 말에 다들 뜨끔한 눈치였다. 돌이켜 보니 그동안 책 읽기는 그저 책에 쓰여 있는 활자를 읽어주는 한글 교육에 불과했다. 아이가 그림과 충분히 대화할 시간을 기다려주기보단 일주일에 몇 권씩 목표량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다.

그날 이후 그림책 읽어주는 방식을 바꿨다.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기다려주니 아이는 주인공 표정, 하늘 색깔, 풍선 개수까지 천천히 살펴보며 호기심을 키워갔다. 아는 단어가 나오면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렸다. 책 한 권을 통해 아이 세계가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 지켜보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이 뇌 발달단계에 맞춰 좋은 자극만 주겠다는 그때 다짐을 요즘 부쩍 지키기 힘들어졌다. ‘선행 학습’과 ‘숏폼’ 유혹 때문이다.

고교 동창 A의 초등생 딸은 지난해부터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등교를 거부하고, 신발을 몰래 버리는 등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병원에선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너무 크다”고 했다. 딸은 세 살 때부터 한글, 영어, 수학 등 선행학습을 했다. 이른바 ‘4세 고시’를 거쳐 영어유치원(유아 영어학원)을 졸업했고, 취학 후에도 여러 학원을 다녔다. 뒤늦게 아이 마음의 상처를 알게 된 A는 “욕심부린 걸 후회한다”고 했다.

또래 부모 상당수는 선행학습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남보다 한 발 일찍 출발하면 입시와 취업에서 유리할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기자 역시 그랬다. 올 2월 첫째 유치원 졸업식에서 한 명씩 단상에 올라 선생님과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데, 몇몇 아이들이 유창하게 영어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영어공부를 더 일찍 시킬 걸 그랬나’라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그림책이 세상의 전부였던 두 아이는 요즘 유튜브와 숏츠에 빠졌다. 아빠 휴대전화를 몰래 가져간 첫째는 20∼30초짜리 숏폼 콘텐츠에 빠져 화면을 계속 쓸어 올리곤 한다. 또래 친구 장난감 놀이나 애니메이션 편집 영상이 반복되는데 아이는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이 집중했다. 이걸 왜 보느냐고 물으니 “그냥 재밌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자만의 고민은 아니다. 여성가족부 2024년 초중고교생 미디어 실태 조사에선 ‘최근 1년간 가장 많이 이용한 매체’로 응답자 94.2%가 ‘숏폼’을 꼽았다. 숏폼은 중독성이 강하다. 짧고 강렬한 자극에 반복 노출되면 아이 뇌는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한다. 긴 시간 집중하거나 충동 조절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는 질 낮은 온라인 콘텐츠를 과도하게 소비하는 폐해를 일컫는 ‘뇌 썩음(Brain rot)’을 올해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다. 해외에선 아동 숏폼 중독과 스마트폰 과의존을 막으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5월 프랑스 정부는 13세 미만 어린이 스마트폰 사용 금지를 검토한다고 밝혔다. 극단적 선행학습을 아동 학대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선행학습과 숏폼,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우리 아이 뇌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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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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