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총재가 바뀐다. 이창용 총재가 물러나고 신현송 전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이 오는 20일 취임한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와 런던정치경제대(LSE),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교수를 지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핵심인 뉴욕연방은행에서도 경력을 쌓았다. ‘적임자’를 골랐다는 평이다.
여건은 녹록지 않다. 우선 강력한 정부를 마주해야 한다. 그를 총재로 지명한 이재명 정부는 역대 정부 가운데 재정 투입에 가장 적극적이다. 정부는 지난해 112조원의 국채를 순발행했다. 전년(50조원)보다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규모다. 한은이 지난해 하반기 기준금리를 동결했는데도 시장 금리가 많이 오른 이유다. 정부 재정정책의 강도가 세질수록 한은의 영향력은 묻힐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 역시 막강하다. 부동산 시장을 잡기 위해 지난해부터 시중은행에 가산금리 인상을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최근 1년 새 큰 폭으로 뛰었다. 여기에다 15억원 이하 주택은 6억원, 15억~25억원 주택 4억원, 25억원 초과 주택 2억원으로 대출금 자체를 묶었다. 수도권 등 규제지역 내 다주택자 주택담보대출은 원천 금지다. 돈줄이 차단되면 금리정책 효과도 자동으로 끊긴다. 한은 통화정책의 파급 경로가 제대로 뚫려 있는 곳은 시중은행과의 초단기 자금시장, 단기 금융상품 시장, 만기 1년 이하 일반대출 시장 정도다.
‘물가 안정’ 하나만 신경 쓰자고 말하는 사람이 한은 내에 의외로 많다. Fed는 물가 안정과 고용 확대를 목표로 하지만 한국은행법(제1조)은 ‘물가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한다’로 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이 어떻게 다르든 한국과 미국 중앙은행은 똑같은 칼을 손에 쥐고 있다. ‘정책금리 결정과 통화량 조절을 통해 시장금리와 경기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
얼마 전 시장에서는 올해 하반기께 한은이 기준금리를 한 차례 정도 올리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돌았다. 지금은 한가한 소리로 들린다. 다가오는 현실은 이보다 훨씬 냉혹스러워 보인다. 중동 전쟁의 여파로 고(高)물가와 경기 침체가 한꺼번에 덮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들이닥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얘기가 거론될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폴 볼커 전 Fed 의장이다. 그는 과감한 고금리 정책으로 1970년대 말 미국의 대(大)인플레이션 시대를 끝냈다. 극심했던 인플레이션은 경제원론에도 나오는 ‘통화정책의 실패’ 사례다.
하지만 그때의 풍경이 그리 단선적이진 않다. 경기 침체 역시 심각했다. 1973년 중동 전쟁과 뒤이은 오일쇼크 여파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그해 6.2%, 이듬해 11%로 치솟았다. 물가 충격이 생산 감축과 대량 실업으로 이어지며 1973년 5.6%였던 경제성장률이 1974년 -0.5%로 곤두박질쳤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시작이었다.
당시 Fed 의장은 아서 번스였다. 물가 안정보다 성장을 중시하는 경제학자다. 대량 실업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리처드 닉슨 정부의 압박이 거셌다. ‘물가’와 ‘경기’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그는 결국 경기를 회복시키는 쪽을 택했다. 경제는 서서히 회복됐고, 1978년 5.5% 성장으로 정상화됐다. 남은 과제는 고공행진하는 물가였다. 이듬해 볼커가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나서게 된 배경이다. 번스와 볼커는 서로 달랐지만 그 시대에 반드시 필요했던 일들을 했다.
신 총재 후보자는 번스일까, 볼커일까. 이런 극단적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으로 내몰려선 안 되겠지만, 무척 걱정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서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규모 재정 투입에 나서야 한다는 정부, 인플레이션이 고착화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한은. 접점이 잘 그려지지 않는 구도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양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봉합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닥뜨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막강한 정부, 깐깐한 금융당국과 조율해야 할 일도 무척 많을 것이다. 끈질기게 설득하는 협상력과 적절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정치력. 신임 한은 총재에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덕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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