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해킹 당했다고 기업 총수에게 배임 강요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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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해킹 당했다고 기업 총수에게 배임 강요할 수 있나

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킬 무렵, 서울 신당동 SK서린빌딩 앞에 30~40여 명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들의 손엔 ‘SK텔레콤, 위약금 면제 이행하라’, ‘최태원 회장이 직접 책임져라’라고 쓰인 팻말이 들려 있었다. 주변에는 기자도 여럿 있었다.

무리의 한가운데는 넥타이를 맨 신사가 서 있었다. 이훈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하루 전 ‘여당’ 소속 의원이 된 그를 이른 아침부터 이곳으로 이끈 건 ‘SK텔레콤 정보유출 사태’다. 이 의원은 기자들에게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나기 위해 왔다”며 “최 회장이 책임지고 SK텔레콤 해킹 피해자에게 (번호 이동에 따른) 위약금 면제를 약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날 최 회장과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사전 약속 없이 이 의원이 일방적으로 SK 본사를 찾았기 때문이다. 유영상 SK텔레콤 사장이 대신 맞이했지만, 이 의원은 “유 사장에게 드릴 말씀은 다 드렸다. 최 회장이 결단해야 한다”며 내쳤다. “위약금 면제 결정은 최 회장이 아니라 SK텔레콤 이사회에서 결정할 사안”이란 유 사장의 설명은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됐다. 이 의원은 “국민들을 위해 위약금 면제를 관철하겠다”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를 지켜본 재계 관계자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씁쓸하다”였다. 위약금 면제 여부는 민간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법률 검토를 거쳐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이 아무 근거도 없이 ‘오너의 결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이 위약금 면제를 결정하면 SK텔레콤 주식을 들고 있는 소액주주 20만 명이 또 다른 피해자가 된다는 것 역시 이 의원도 알고 있다. 3년간 예상 손실액이 7조원에 이를 수 있는 중대 사안을 SK텔레콤의 이사회 멤버도 아닌 최 회장이 결정하라는 건, 민주당이 항상 문제 삼아온 ‘총수의 월권과 배임’을 행사하라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민간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와 정부의 법률 검토 결과를 토대로 SK텔레콤 이사회에서 위약금 면제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SK의 반론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렸다. 이번 정보 유출 사태의 배후에 전문적인 해킹 집단이 연루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개별 기업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대응할 사안으로 봐야 할 여지도 있다는 얘기다.

기업들은 이날 이 의원이 보여준 모습에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사와 전혀 다른 목소리가 언제든 현장에서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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