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는 단어 대신에 ‘민주제도’를 사용하는 게 낫다. 단어 민주주의는 관념성 때문에 반민주적으로 악용되기가 쉽다. 반면 단어 민주제도는 ‘제도’가 구체적인 피지컬이어서 민주제도 가운데 인민민주제, 자유민주제 등이 명칭만 비슷할 뿐 ‘완전히’ 다른 체제를 부른다는 점을 설명하기 용이하고 무엇보다, 민주제도가 자동차나 TV처럼 철저히 인공물(人工物)인지라 언제든 망가질 수 있음을 경각시켜준다. 특히 한국인들의 고질병인 성리학적 기질상 민주‘주의’는 위선의 가면을 쓴 도그마(dogma)로 작용해 온갖 악행의 명분과 변명이 되고, 민주제도의 ‘다양한’ 오작동을 점검할 생각 자체를 차단하기도 한다.
자유민주제도가 포퓰리즘, 선전선동, 악성 정치기술 등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은 이미 고전적 근심이 된 지 오래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유민주제도의 선거는 ‘공정함만 의심받지 않는다면’ 인류가 만들어낸 최선의 정치적 합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나치가 자유민주선거에 의해 집권한 것은 자유민주제도가 원래의 이상과는 달리 악의 수단으로 전락한 대표 사례며 요즘에는 같은 이유로 베네수엘라를 보면 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연구들은 좌익, 우익, 혼종체제(混種體制)를 가리지 않는데, 예컨대 포퓰리즘은 주로 경제적 사안에 적용돼 왔다. 자유시장경제학은 지동설처럼 사람의 감각에 와닿지 않는 반면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은 천동설처럼 즉시 받아들이게 되고 감성적이다. 물론 항상 선량해 ‘보이는’ 동기에 최악의 결과를 낳는 ‘무식(ignorance)’의 소치로 드러나지만. 한데, 이런 코미디 같은 비극을 정신병리(Psychopathology)로 다루는 시도들이 심심치 않다. 현대 자유민주정치가 정치가 아니라 정신병의 차원으로 넘어간 것이다. 비록 정치 해설서는 아니되 그릇된 정의감에 중독된 대중들을 다루고 있는 안도 슌스케의 <정의감 중독 사회>는 참고할 만하다. 이 책은 만사에 정의(justice)를 갖다 대며 심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숨이 막히는 사회의 위험성을 분노조절 전문가의 시각에서 설명한다.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정의감 중독’으로 비화하는 메커니즘, 정의감 중독의 다섯 가지 유형과 현명한 대처법 등을 말한다.
내 생각에 우리는 이를 정치적 사유(思惟)로까지 확장시켜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인간은 이념에 의해 정치적 선택을 하는 듯 보이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착각하고 있지만, “나치즘을 추종한 사람들의 주요 특성은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다. 사회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개인적 자아를 투영함으로써 목적의식과 자긍심을 찾으려고 한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요약은 마음의 어둠이 그 어두운 사람들의 정의감이 되고 그것이 곧 정치적 경향이 되는 과정을 논한다. 하지만 이것도 21세기에는 낡은 모델이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돈과 직책이 있는 사람들마저도 똑같이 저러한 환자인데 추가 증상이 위선과 ‘자아도취(自我陶醉)’다.
마약(정의감)을 퍼뜨려 권력과 부는 물론 시대까지 송두리째 장악하는 세력은 마약범죄처럼 상존한다. <정의감 중독 사회>는 마약 같은 정의감(분노)과 내적 공허를 맞바꾸지 말라고 한다. 올바른 판단이 먼저고 감정은 그 다음 문제라는 게 과거의 이론이었다면, 평온한 마음과 올바른 판단은 함께 있어야 동시에 작동 가능하다는 게 지금과 미래의 이론일 것이다. 이러니 자유민주제도가 어렵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주인으로 살기보다 노예로 사는 게 사실은 더 편하다. ‘의심할 필요’가 없고 결정할 일이 없으니까. 자유민주제도는 정의로운 사람들 이전에 그 정의로움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형식이다.
한 정치인의 어떤 우울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자유민주제도와 자유시장경제 옹호자는 지루한 지식을 교육해야 이기는 게임이고 인민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것의 옹호자는 빠른 분노(정의감?)를 유포시켜야 이기는 게임이다. 이렇듯 현대 정치가 어차피 유포의 게임인 바에야, 후자의 무식을 비웃는 유머(humour)를 유포시키는 게 전자의 승리 전략일 수 있다고. 자유민주제도의 이 어려움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괴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