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이창용 총재의 이유 있는 오지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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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이창용 총재의 이유 있는 오지랖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은행(BOJ) 총재를 지낸 사라카와 마사아키는 퇴임 후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돌아봤을 때 경제 당국의 가장 큰 정책적 실수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일본 정부가 2001년 디플레이션을 선언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 이전까지 일본 정부는 디플레이션을 ‘물가 하락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2001년 3월엔 ‘경제 상황과 관계없이 물가가 하락 추세를 보이는 환경’으로 규정하고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처했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20여 년간 디플레이션은 일본 거시경제 정책 논의의 중심이 됐다.

사라카와 전 총재는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신기루라고 봤다. 물가가 완만하게 하락하는 상황에서 경기 확장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물가 하락으로 부채의 실질 부담이 증가해 소비가 위축되거나, 실질 임금이 상승해 실업률이 치솟는 ‘디플레이션 스파이럴(악순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금융 안정이 유지됐고, 무엇보다 기업들이 임금을 낮춰 종신고용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물가 하락은 저성장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봤다.

문제는 이미 사회 전반에 ‘일본 경제의 가장 큰 숙제는 디플레이션 탈출이며, 이는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늘리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서사가 형성됐다는 점이었다. 정치인은 물론 언론, 기업인 등 모두가 중앙은행의 공격적인 통화정책을 요구했다. 사라카와는 이런 서사가 고착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 일본 경제가 직면한 핵심 문제는 물가 하락이 아니라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 산업 경쟁력 저하, 이에 따른 잠재성장률 하락이며, 이는 돈을 푼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중앙은행 총재가 할 일이 아니다’라거나 ‘통화 완화에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아베 신조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2013년 스스로 사임했다. 후임자인 구로다 하루히코 전 총재는 ‘아베노믹스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국채뿐 아니라 위험자산까지 사들이는 양적·질적완화(QQE)로 돈을 풀었다. 아베노믹스는 주가를 부양하고 물가를 띄우는 데는 일부 성공했지만 ‘세 번째 화살’인 구조개혁에는 끝내 실패했다.

사라카와의 통한은 사회적 압력이 어떻게 경제 현상에 대한 잘못된 진단과 처방으로 이어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측면에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꾸준히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건 한은도 일본은행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라고 봐야 한다. 한은은 이 총재 취임 후 3년여간 교육, 이민, 균형발전, 가계부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보고서를 내왔다. 모두 우리 경제의 저성장을 고착화하는 구조적 문제를 겨냥한 것들이다.

전현직 금융통화위원들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단기적 경기 대응이지만, 현재의 경제 상황이 단기 사이클에 의한 것인지 구조적 추세에 따른 것인지를 이해해야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우수한 연구인력을 보유한 데다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한국은행이 필요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책임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 총재의 오지랖이 너무 넓다’며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최근 한 여당 최고위원도 “정치를 하는 것”이냐며 “자숙하고 본래 한은의 역할에 충실하라”고 했다. 이 총재의 침묵을 원한다면 우리 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해 진짜 필요한 개혁이 무엇인지 국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리더십을 정부·여당이 발휘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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